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편집기자가 말하는 편집 / 김남준 동아일보 부장


다성음악(Polyphony)식 병렬편집의 효능은?


음악     “다성음악에서는 2개 이상의 성부가 독립적으로 움직인다. 다성음악만큼 민주적인 음악도 없다. 모든 성부가 동등한 지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성음악에서는 모두가 주인공이다.” (진회숙)
▶지면1: 2성부 이상의 멜로디가 대위법적으로 얽혀 들어가며 새로운 음악적 입체성을 창조해내는 다성음악처럼, 사안의 중층성을 다각적으로 제시할 때 다성음악식 병렬편집은 효과적이다. 두 기사를 위아래로 나란히 배치해 이천 물류창고 화재 참사의 문제점을 복합적으로 제기했다. 열악한 작업 환경과 안 먹힌 정부 대책(샌드위치패널 규제)이 맞물려 빚어낸 인재(人災)였음을 중층 편집으로 힘 있게 전달했다.
▶지면2: 하나의 기사로도 제목을 ‘여러 성부’로 배치해 다성음악식 편집의 효과를 낼 수 있다. 49일째 최장 장마에 쓰레기는 쌓여가는데 복구인력은 부족하고 재난예산은 바닥난 3중고를 3층 제목으로 풀어냈다. 딱히 큰 한방 제목거리가 마땅치 않은 기사일 때 동급의 제목 여러 개를 모두 주인공으로 내세워 제목이 내는 목소리의 힘을 키울 수 있다.
악보를 뛰쳐나간 음표의 자유는 어떤 힘을?
“너희 백인들은 악보대로만 연주하지만, 우리는 재즈 즉흥연주라는 창조의 힘이 있다.”(미국 흑인민권운동가 말콤 엑스)
▶지면3: 족보의 허실과, 귀화자들로 생긴 새로운 성씨를 다룬 양면 편집인데 의도적으로 대칭편집 구도에 변화를 줬다. 족보 기사에는 딱딱하게 각진 사진을 썼지만, 오른쪽 귀화자들의 사진은 사각 틀을 벗어나 자유롭게 변주했다. 악보를 벗어나는 즉흥연주처럼 프레임을 벗어나는 사진 배치로, 전통의 틀을 깨고 새 성씨를 자유롭게 창조해내는 역동성을 부각시켰다.
복제 불가능한 불가사의 영역을 재현하려면?
“절대 반복되지 않는 경험이 있다. 시적이고 불가사의한 영역으로, 한 번 일어난 일은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 복제가 불가능한 첫 키스, 자녀의 출산, 그밖의 일회성 사건들이 그것이다. 재즈는 이러한 불가사의한 영역에 속해 있다. 재즈의 실험이 반복되어도 절대 똑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재즈는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을 함께하고자 하는 사람을 위한 음악이다.”(테드 지오이아)
▶지면4: 프리 재즈 색소포니스트가 어떤 단색 그림에서 ‘원초적 영감’을 받아 즉흥연주 앨범을 냈다. 이 ‘불가사의 영역’을 다룬 기사를 어떻게 편집해야 할까. 편집자는 단색 그림 앞에서 연주하는 그 일회성 순간을 재현하는 방식을 택했다. ‘단색 그림을 프리 재즈로 내뿜다’라는 제목을 뿜어 그 시간이 다시 흐르도록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리하여 바로 그 생성의 흐름에 올라타는 편집을 꾀했다.
실수인 듯, 고의인 듯 럭비공만의 논리는?
“텔로니어스 몽크는 선행하는 음에 깜짝 놀란 사람처럼 이어지는 음을 연주했다. 건반에 손가락을 댈 때마다 실수를 바로잡는다는 듯. 그러나 곧이어 건반에 손가락이 닿으면, 그것이 또 하나의 실수가 되어, 처음의 의도대로 곡을 연주할 수 없으리라는 듯. 그의 손가락들은 항상 그 자신에게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몽크만의 논리가 있었다. 그는 어떤 형식에서 나타날 거라고 생각되지 않는 음을, 처음 기대했던 음을 부정하는 음을 연주했다.”(제프 다이어)
▶지면5 : 트럼프만큼 재즈적인 정치인이 있을까.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는 기습 공격, 그 자신조차 어디로 튈지 모를 것만 같은 즉흥성, 자신만의 논리로 기성 정치 논리를 부수는 고집스런 파격. 푸틴과의 정상회담에서 “러시아가 미 대선에 왜 개입하겠나, FBI 조사는 재앙”이라 밝히자 온 미국이 “이적행위”라고 비난하며 발칵 뒤집혔다. 선물받은 러시아 월드컵 공인구를 툭 던지듯, 그는 그 자신이 럭비공이 되어 외교적 자살골을 헌납했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실수 같은 고의’라는 럭비공만의 논리로 자살골을 내주고도 ‘의문의 1승’을 따냈을지. 이 복잡, 엉뚱한 외교 무대는 예측불가 재즈 무대와도 같았다. 편집자는 텔로니어스 몽크 이상으로 괴짜인 트럼프의 즉흥 솔로 연주를 낚아챘다. 럭비공 같은 축구공이 통통 튀며 솟아오른 바로 그 순간.
새빨간 질문: 차곡차곡 다져올라가 폭발시키는 편집으로 거대한 카타르시스를 줄 수는 없을까?
“푸르트뱅글러는 동적인 지휘자이다. 코다(종결부)를 향해 거센 노도와 같이 휘몰아쳐 올라가는 아첼레란도(점점 빠르게), 이윽고는 악기가 제 소리를 못 내고 앙상블도 흩어져버릴 듯한 스피드에 이르고 마는 격앙된 상태. 판에 박은 듯한 일상성 속에서 이러한 연주는 확 트인 해방감을 안겨준다. 푸르트뱅글러는 클라이맥스 직전에 충분한 복선을 까는 배려도 잊지 않는다. 곡이 움직이기 직전의 극도로 느린 템포, 음량의 극단적인 억제를 통해 앞으로 다가올 엄청난 산사태와도 같은 질풍노도를 가슴 졸이며 기다리게 만드는 등, 그의 마술과 같은 연주 표현은 우리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다.”(안동림)
▶일반적으로 뉴스 편집은 두괄식이다. 먼저 주제목이나 메인 사진을 제시한 후 부제목으로 부연 설명을 하는 식이다. 이를 뒤집어 ‘임팩트의 마에스트로’ 푸르트뱅글러처럼 암시와 복선으로 차곡차곡 쌓아간 후 마지막에 화산 폭발과도 같은 클라이맥스를 터뜨리는 편집은 어떨까. 가령 작은 원인과 징후가 쌓여가다가 거대한 의외의 결과를 빚어내는 경우(재난 사고, 정치 격변, 스포츠 이변 등)에는 사안의 역동성을 극대화해 독자에게 극적 충격이나 해방감을 폭발시키는 편집도 해볼 만하지 않을까.


 


미술은 공포·불안을 표현하는 마술?
미술     “해질 무렵 나는 친구 둘과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이 핏빛의 붉은색으로 변했다. 그때 나는 자연의 비명 소리를 들었다.”(에드바르 뭉크)
▶지면6: 익숙한 대상에서 문득 기이한 불안이나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다.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낯익은 두려움(uncanny)’을 뭉크는 노을에서 보았다. 아름다운 노을에서 핏빛 비명소리를 들은 뭉크처럼, 명민한 편집자는 어떤 풍경에서 오싹함을 빚어낸다. 제천 화재 참사 사진을 살짝 리터치했는데, 타버린 건물은 붉은색으로 놔두고, 나머지 멀쩡한 건물들의 색을 빼 잿빛으로 만들었다. 모든 건물이 재가 돼버릴 수도 있다는 경고처럼 으스스하다.
▶지면7: 초등생의 참혹한 죽음 이후 동네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 대낮 놀이터에도 사람이 없는 분위기를 증폭시켜 주민들의 공포를 표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놀이터 바닥을 검게 잡아 늘려 불안의 심연 속으로 끌고 내려갔다.
인간과 동물이 고통이라는 지점에서 만나면?
“나는 항상 ‘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정육점의 고기와 같이 비참한 일이다. 고통받는 인간은 동물이고, 고통받는 동물은 인간이다.”(프란시스 베이컨)
▶지면8: 인간은 고통받을 때 고깃덩어리가 된 듯한 느낌을 겪는다. 역으로, 고통받는 동물의 모습에서 인간 자신의 고통을 가체험한다. 그렇게 인간과 동물은 고통이라는 지점에서 벌거벗고 서로를 마주한다. 인간에 의해 동물원 철창에 갇힌 침팬지의 고통. 인간에게서 받은 고통을 고스란히 인간에게로 되돌려주는 제목이 아프다. ‘인간의 욕망 때문에, 절망에 갇혔다’. 
콜라주를 넘어 콜라보로 가려면?
“함께만 있다고 콜라보는 아니다. 함께해 뭔가 새로운 것을 내놓는 결과 도출의 윈윈 파트너십이어야 콜라보다.”(한젬마)
▶지면9: 콜라보는 그저 오려 붙이는 콜라주를 넘어 대등한 이종결합으로 더 새롭고 더 힘있는 효과를 창출한다. 우리 생태계를 흔드는 외래동식물을 다룬 지면인데, 거대한 황소개구리와 한옥 대문을 이종교배시킴으로써 ‘달갑잖은 불청객’이라는 새로운 메시지를 낳았다.
▶지면10: 각각 대선과 도쿄올림픽을 의식하다 코로나 사태를 악화시킨 트럼프와 아베. 얼굴을 흔히 하듯 반반씩이 아니라 잘게 나눠 붙여 절묘한 닮은꼴 새 얼굴을 만들어냈다. 낯선 시너지를 낸 성형 콜라보.
새빨간 질문: 모나리자의 미소처럼, 양립 불가능한 복수의 진실이나 충돌하는 해석을 원샷에 보여주는 편집이 가능할까?
“모나리자의 미소는 인간적인 것을 넘어 성스럽기까지 한 미소다.”(조르조 바자리)
“모나리자의 미소는 왠지 불안해 보이고 음란하며 쾌락적이고 열정적이지만 슬프게도 보인다.”(이폴리트 텐느)
▶‘성(聖)’과 ‘속(俗)’이 동시에 흘러넘치는 미소. 사람들은 모나리자의 미소에서 온유한 수줍음을 보기도 하고 냉소적 뻔뻔함을 읽기도 한다. 하나의 의미로 규정할 수 없는 형상. 하나의 ‘기표’에 여러 ‘기의’들이 내려앉았다가 날아가 버리는 신비. 양면성이나 다중성을 지닌 미묘한 사안에 대해 이런 편집을 적용해보면 어떨까. 한 줄의 중의적 제목으로, 또는 한 컷의 야누스적 비주얼로 ‘일도양단할 수 없는 복합적 진실’을 전달해볼 수 있지 않을까.


왜 신문 2개면을 담요 사진으로 도배했나?
광고     일주일에 한 번씩 신문에 칼럼을 써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제가 글재주는 없고 그림으로 칼럼을 쓰겠습니다.” 그러면서 지면 두 면 통으로 달라고 했다. 이불신문을 만들었다. 카피는 명료했다. “오늘밤 누군가는 이 신문을 이불로 써야 합니다.”(이제석)
▶지면11: 광고인 이제석이 한 일간지에 게재한 ‘이불신문’ 공익광고. 오른쪽 하단에 “오늘밤 누군가는 이 신문을 이불로 써야 합니다.”라는 카피와 함께 노숙인 돕기 적십자 성금 계좌가 적혀 있다. ‘이불신문’을 본 독자들의 온정이 쇄도했다고 한다. 매체 그 자체를 크리에이티브로 제대로 활용한 사례.
종이신문이라는 매체만의 물성과 매력은?
얇거나 두껍다. 가볍다. 펴면 넓다. 구겨진다. 찢어진다. 칼이나 가위로 잘 잘린다. 물에 젖는다. 액체를 쏟으면 번진다. 불에 잘 탄다. 표면이 평평하다. 돌돌 말 수 있다. 나누거나 이어붙일 수 있다. 양면인쇄를 한다. 공간을 전체 또는 부분만 선택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종이신문 독자들에게는 이처럼 종이신문만 줄 수 있는 질감과 감성과 효능으로 더욱 어필해야 하지 않을까.
▶지면12: 온라인 화면에서는 엄두를 낼 수 없는 시각적 장쾌함을 독자에게 선사할 수 있다. 역대 최장 48cm 비례투표용지를 실 사이즈로 보여줄 수 있는 매체는 대판신문밖에 없다. 더구나 종이인 투표용지이기에 실제 종이 신문에 실어 보여줄 때 독자는 어느 매체에서도 맛볼 수 없는 리얼한 실감을 느낄 수 있다.
▶지면13: 신문 백지 자체를 마스크팩으로 센스있게 활용한 사례.
▶지면14: 브렉시트 운명의 날, 영국 캐머런 총리가 종이 문틈 뒤편에서 햄릿처럼(남을 것인가 나갈 것인가) 고뇌하는 모습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했다.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상상력을 자극하라?
“보여주지 말고 상상하게 하라. 소비자의 상상력을 믿어라. 뛰어난 크리에이터는 제품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제품을 더욱 강조할 수 있다.”(유영실)
▶지면15: 시드니 아쿠아리움의 지면 광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계단 하나가 전부다. 얼마나 신비한 세계가 펼쳐질지 독자로 하여금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한다.
▶지면16: 영화와 드라마 속에 등장했던 외계인들을 펼쳐놓고는 “이런 모습은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독자들의 궁금증을 자극해 미지의 외계인을 그려보도록 만든다.
새빨간 질문: 계도성 기사를 설교스럽지 않게 독자 가슴에 사뿐히 내려앉게 할 편집 방법은?
“뉴욕에서 공부할 때 가장 크게 감탄했던 것은 광고들이 가볍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광고를 보는 사람들 가슴 속에 기분 좋은 느낌으로 사뿐히 내려앉을 수 있을 만큼 가볍다는 겁니다. 가치를 말하면서 설교까지 한다면 광고는 실패할 겁니다.”(박웅현)
▶음주운전이나 흡연 등 계도성 기사를 실을 때 ‘말발’이 먹히게 하려다보니 점점 더 센 수위의 표현을 찾는 경향이 있다. 선생님처럼 혼내는 식의 접근이 아닌, 친구처럼 툭 치며 공감을 얻는 경쾌한 방식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그게 더 효과가 좋지는 않을까.

자유의 여신상을 어떻게 사라지게 했을까?
마술     데이비드 카퍼필드의 마술. 카메라 조작도 아니고, 화면 조작도 아니다. CG를 이용하지도 않았다. 자유의 여신상에 어떤 변형을 가하거나 장막을 씌우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어떻게 감쪽같이 사라졌을까.
▶지면17: 카퍼필드는 ‘판을 크게 돌리는’ 마술로 자유의 여신상을 없앴다. 즉 자신과 관객과 방송 스태프들이 서 있는 특설무대 자체를 회전시켜 장막을 걷어냈을 때 자유의 여신상이 보이지 않는 효과를 만들어냈다. 편집자도 때론 판을 크게 돌려 독자에게 마술을 부릴 수 있다. ‘어차피 꼴찌라는 예상, 뒤집어버려!’라는 제목처럼 판을 뒤집었더니 16강 진출 확률 꼴찌였던 한국이 선두로 뒤바뀌는 마술(오른쪽 하단)이 일어났다.
새빨간 질문: 독자에게 태초의 경이감을 선사하는 마술같은 편집, 순수의 꿈을 일깨우는 편집 방법은?
“당신이 태어나 처음 첫눈을 봤을 때를 생각해보라. 아니면 처음으로 산을 붉게 물들인 노을을…. 그게 당신이 본 첫 마술이다. 마술은 기술도 속임수도 사기도 아닌 꿈이다.”(이은결)
▶마술은 없던 걸 만들어내는 연금술이 아니다. 원래 우리 안에 있었지만 잃어버린 꿈과 신비를 되살리는 복원술이다. 신문을 펼치는 독자들도 때론 상실된 어떤 것이 마술처럼 되살아나길 기대할지 모른다. 그들에게 신문은 꿈으로 안내하는 보물지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연결과 결합으로 작동하는 모든 콜라보는 ‘낯설게 하기’를 통해 메시지 수용자의 이성과 감성을 사로잡는 것을 목표로 한다. ‘낯설게 하기’는 ‘창의적으로 말걸기’에 다름 아니다. 차갑고 각진 팩트에서 복잡미묘한 진실의 주름을 되살려 전달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자유자재의 조형술이 더욱 긴요하다고 본다. 그러자면 어린아이처럼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얼핏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것들도 오려내고 이어 붙여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자유. 가장 창조적인 사람은 상상력의 비포장도로를 자유 질주하는 어린아이가 아닐까. 자기 안에 숨어 있던 아이의 눈으로 뉴스를 한번 바라보면 어떨까. 그런 자기찾기 놀이를 하며 뉴스 편집을 즐겨 보면 어떨까.
다른 편집자들의 지면과 다른 커뮤니케이션 매체들을 통해서 자기찾기 놀이의 탄력을 받을 수 있다. 동료들의 지면, 타 예술매체들의 메시지와 나의 공감이 만나는 삼거리에서 몰랐던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이런 것에 움직이는구나. 편집자가 독자에게 가닿기 위해 뚫은 구멍인 소통로(疏通路)는 편집자와 편집자를 이어주는 소통로(小通路)이기도 하다. 편집자인 나는 너의 독자로, 편집자인 너는 나의 독자로, 편집자끼리도 자리를 교대하며 구멍을 들여다보는 역할놀이. 함께의 힘으로 북돋우는 응원놀이는 우리를 지치지 않게 한다. 결국 편집은 좁은 나로부터 탈주하고 확장하다가 새로이 발견된, 성장한 자신을 마주치는 놀이가 아닐까 한다. 편집자가 탈진이나 타성의 늪에 빠지지 않으려면 이 자기발견과 자기계발의 놀이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즐겨야 한다고 믿는다. 편집자가 처지고 늘어지면 독자는 반응하지 않을 것이므로.
사람들은 넓어지고 싶고 깊어지고 싶어 뉴스를 읽는다. 편집자의 탱탱한 호기심으로 독자의 호기심을 격발시키자. 독자에게 ‘바깥’을 꿈꾸게 하자. 갑갑한 격리의 코로나 시대, ‘앉아서 유목하기’의 꿈은 더욱 절실해졌다. 모든 뉴스에는 꿈의 주입구가 있다고 믿는다. 꿈의 주입구가 안 보이면 편집자가 직접 뚫어보자. 그 뚫은 구멍으로 편지 한 통 독자에게 띄워 보내자. 편집은, 편지다. 쓰는 사람이 절실하면 읽는 사람이 감동하는. 나는 오늘 어떤 편지를 쓸 것인가. 어떤 구멍을 뚫어 보낼 것인가. 스스로에게 되물어 본다. 지적 유희를 즐길 준비가 되어 있는 독자들이 우리 편지를 기다리고 있다, 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