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愛玩과 伴侶 사이

 

일본어에서 ‘Toy’는 ‘완구’(玩具)로, ‘Pet’은 ‘애완’(愛玩)으로 번역되었다. 애완은 오래도록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던 터에 완구에서 그 만 사달이 났다. 완구와 장난감이 함께 쓰이는 지라 인간과 동물의 정서적 교감, 동물권에 눈 을 뜬 이들이 ‘번역과 의식 사이’에 괴리가 생겼 다. 아이들은 아무리 좋아하는 장난감이라도 싫 증나면 버린다고, 개와 고양이처럼 정서적 교감 을 하는 동물은 ‘가지고 놀다 버리는’ 존재가 아 니니 ‘애완’이 적절치 않다는 것이 당시의 이들 의 말이다. 그 갈음말이 서구에서 한때 Pet 대 신 쓰이기 시작한 ‘Companian’이고, 우리가 받 아들인 번역어가 ‘반려’(伴侶)다. 반려란 말이 세 력을 얻은 까닭이다. 이제 영어권에서도 굳이 ‘Companian Animal’이라 하지 않더라도 펫을 ‘Source of Companionship and Pleasure’로 풀 어 쓴다.

자전에 완(玩)의 뜻은 희롱할 롱(弄)이 첫손 꼽히지만 오(娛)·종(悰)·락(樂), 기(嗜)·호(好)·애 (愛)도 못지않은 의미의 갈래다. 애초에 둥근 구 슬이니 가지고 놀 만했겠고, 그래서 즐거움과 취 향이 뒤따랐을 법하다. 옛적에 선비는 연적과 같 은 문구와 서가 등이, 여인에게는 노리개와 패 물이 애완물이었다. 완미(玩味) 완상(玩賞) 완월 (玩月) 완독(玩讀) 같은 어휘에서 보듯이 愛玩에 는 그 사람의 주관적인 정념과 더불어 심성과 기 호와 품격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또한 정물이든 무정물이든 오래도록 손 타거 나 손때 묻은 것들이다. 여인의 패물은 출가하는 딸, 집안에 든 며느리에게 전해지는 정표(情表) 이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玩에는 “사랑하여 대 대로 전해 가며 가까이 두고 다루거나 보며 즐긴 다”는 전완(傳玩)이란 말이 사전에 남아있기도 하다. 어떻든, 가까이 두고 즐기며 살뜰히 여기는 건 정붙이라 하겠고, 애완은 그런 존재 곧 ‘정 붙이’였다.

한자권에서 우리나라만큼 반려란 말이 널리 쓰이는 나라가 있을까. 반려동물, 반려식물, 반 려견, 반려묘, 반려인, 심지어 반려로봇까지-. 이 말의 일상화는 인간과 생물의 교감, 생물권 기 여 못지않게 사람 사이의 본원적 관계를 새겨보 기 위해서도 바람직한 현상이라 본다. 쓰다 보 면, 쓰임새에 맞게 본뜻이 복원될 수도 있겠다는 희망에서다. 伴侶는 사람 인 변(⺅)이 아니더라 도 뜻은 능히 살필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사람 사이 특히 남녀 사이가 주격인 말이다.

내친김에 발칙한 상상을 해본다. 성서의 제1 계명 과 제2 계명.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의 ‘아내(남편)’를 사랑하라.” “ ‘무릇 살아있는 것들’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인간에 대한 계명이 아닌, 신에 대한 사랑의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고 나서 누군가에 게 ‘伴侶’라 할 수 있기를….                 

세계일보 교열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