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성경 구절을, ‘태초에 편집이 있었다’라고 재해석해낸 사람은, 편집기자 함정훈 (전 서울신문, 국민일보 편집국장)이었다. 신이 천지 창조를 하는 과정은 7일간의 ‘편집’이었고, 인쇄물의 관점에서 보자면 7개의 지면을 편집한 것이었다. 하느 님은 천지라는 백지에서 7개의 면을 기획해 ‘세상’을 짜냈다. 물론 하루를 쉰 일요일은, ‘전면광고’였다. 넷플릭스 최고 흥행의 드라마가 된, 한국영화 ‘오 징어게임’은 들여다볼수록 천재적인 에디톨로지의 보고(寶庫)임을 느끼게 된다. 저 함정훈기자의 관점 에 따른다면, ‘오징어게임’은 몇 개의 면으로 짠 지면 일까. 놀랍게도 천지창조와 같은 7개면이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달고나,줄다리기, 구슬치기, 징검다 리, 오징어게임 등 6개만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맨 앞에 지하철 정류장에서 벌이는 ‘딱지치기’를 간과한 것이다. 호객꾼으로 등장하는 까메오 배우 공유는, 전전긍긍하는 빈털터리 성기훈(이정재)에게 접근해 딱지치기 게임을 제안한다. 70년대 유행한 딱지는 일 본에서 들어온 멘코(面子)의 일종으로 인쇄된 그림 이 있는 둥근 모양의 한겹 딱지였다. 그러나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딱지는, 종이를 접어서 두툼하게 만 든 전통딱지다. 멘코의 경우는, 딱지치기를 할 때 땅 에 놓인 딱지 옆에다 내려치면서 바람을 일으켜 딱지 를 넘긴다. 그런데, 전통딱지는 두께가 있어서 바람 만으로는 넘어가지 않기에, 딱지의 한 귀퉁이를 세게 쳐야 한다. 딱지의 귀를 때리면서 탄력을 만들어 뒤 집히도록 하는 것이다.

딱지의 귀를 온힘을 다해 때려 넘기기. 이 게임에서 승자는 딱지가 아니라 패자의 귀(싸대기)를 거의 사 람이 넘어질만큼 세게 때린다. 게임에서 벌이는 행위 를 그대로 사람에게 적용한 것이다. 기훈은 공유에게 여러 차례 뺨을 맞으면서, 사이사이에 몇 번의 승리를 거둬 푼돈을 챙긴다. 맞아서 시뻘개진 뺨을 한손으로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만원 짜리 몇 잎을 들고 생 일을 맞은 딸에게로 간다. 딱지게임은, 영화의 ‘속내’ 를 리얼하고도 감각적으로 내보이는 1면 편집이다. 



1면-딱지치기

신문 1면편집은, 주요한 기사를 모아 독자에게 우 선적으로 보여주는 서비스라고 생각해왔다면, 당신 은 오징어게임 편집자에게 이미 진 패자 편집자이다. 이 영화의 게임 룰로 보자면, 이미 죽은 사람이다. 오 징어게임 1면편집은, 그 첫페이지가 독자(혹은 관객) 와 내면적으로 딜링하는 유혹의 시간이며 앞으로 보 여줄 것에 대한 ‘백화점 쇼윈도’와 같은 것임을 증언 하고 있다. 이 1면이 보여준 편집 콘텐츠의 핵심은 뭘 까. “게임은 장난이 아냐. 딱지가 따귀를 맞는 것을 넘어 사람이 따귀를 맞는 것이라고. 다만 상과 벌은 분명하다. 상(賞)은 돈이다. 아참, 그러나 게임은 폭 력과 달라. 네가 원하는 때만 시작되는 것이니까. 네 가 선택하는 것이지. 그러니까 상도 벌도 스스로가 원한 것이지. 다만 특징이 있다면, ‘레알 게임’! 이것 뿐이라고.” 공유는 이 말을 싸늘한 미소 속에 담은 침 묵으로 보낸다. 1면은 독자와 눈을 맞추는 게임이다. 그 다음 페이지를 넘기고 싶도록, 파격적인 유혹을 담은 지면이라야 한다. 



2면-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2면 편집을 보자.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이것은 술래잡기 게임의 한 변종(變種)이다. 초등교 교과서 에 단골로 등장하는 영희가 술래다. 여기에도 ‘편집 의 달인’이 부린 솜씨가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다. 우선 영희는, 어리고 작은 소녀이겠지만 영화 속에서 는 ‘거인’이다. 술래는 거인이고 접근자들은 왜소하 고 겁에 질려있다.  편집의 기술 중에서, ‘작은 것을 크게 편집하라’는 말이 있다. 아주 작은 물건들을 크 게 확대된 이미지로 배치해놓으면, 지면에 긴장감과 생동감이 생긴다. 인물사진을 쓸 때도 전신과 배경 을 모두 쓰지 않고, 파격적으로 뚝 잘라 핵심 부 위를 부각시킨다. 이것을 클로즈업 기법이

라고도 한다. 이렇게 사진을 쓰면, 몰 입효과가 나타난다. 헐리우드 영화 들이 전경(全景)을 보여주지 않고, 사람의 얼굴이나 부분부분의 사물 과 풍경들을 바싹 들이댄 화면들을 보여줌으로써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테크닉과 비슷 하다. 영희는 큰 몸으로 클로즈업되고, 특히, 인형의 눈은 확대되어 접근자들을 스캔한다. 

동심(童心)을 표상하는 인형의 눈에는 초첨단 CCTV의 ‘워치’기능이 탑재되어 접근행동을 들킨 사 람을 순식간에 포착하여 ‘제거’한다. 여기서 대량 살 육이 발생한다. 2면은 1면의 이면(裏面)이며, 1면이 전경(前景)으로 보여준 세상의 속내를 드러내는 장 (場)이기도 하다. 게임의 실패자를 서슴없이 총살하 는 장면은, 독자에게 경악과 충격을 안기며 긴장감 을 일거에 극대화한다. 게임은 결코 장난이 아니다. 한껏 자극했던 동심을 뒤엎는 이 반전이 영화 전체 를 스릴러물로 이끌어간다. 

1953년 한국전쟁 중에 태어난 잡지 ‘사상계’는, 동 서고금의 사상을 밝히고 바른 세계관과 인생관을 수 립하겠다는 의욕을 드러냈다. 전쟁으로 피폐한 세상 에 생각과 삶과 문화의 꽃을 피우겠다는 선언이었다. 1959년 4.19혁명 직전 ‘민심의 고압선’이 지나가는 4월 에 나온 이 잡지의 이면(裏面)인 권두언에는 내용이 한 글자도 담기지 않은 백지사설을 실었다. 다만 이런 제 목 하나만 달렸다. “할 말이 없다” 타락하고 부패한 이 승만 권력을 향해 내던진 침묵의 항의. 이 언론이 던진 충격은 당시 세상을 긴장시키고 숨은 분노를 끌어올 렸다. 영희의 눈이 번쩍이고 운동장에 피의 시신들이 쓰러지는 순간의 충격과도 같은 ‘편집’이었다.

2면에서 술래인형이 죽일 자를 스캔하는 동안 읊 는 구호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이다. 이 게임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문장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세 군데를 띄워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로 읽게 된다. 한국신문들은 오래전부터 ‘제목 10자룰’이란 것을 노하우로 다듬었다. 제목을 길게 달면 독자들이 산만 해진다는 전제 위에서, 제목을 10자 이내로 짧게 달 아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 근거로, 한글명사는 대개 2~3자가 대부분이고, 그뒤에 붙은 조사는 생략할 수 있으며, 대개 세 개의 어절(주어+목적어+술어)로 문 장이 구성된다는 점을 든다. 예를 들면 ‘영희(는) 철 수(를) 사랑(한다)’라는 제목을 만들 때 딱 10자가 나 온다. 조사와 보어를 빼면, ‘영희, 철수 사랑’이 되어 6 자로 압축된다. 명사가 3글자씩일 경우인 ‘이영희, 김 철수 짝사랑’의 경우 9자가 된다. 한글의 어절과 문장 구성의 특징을 감안해, 세상 대부분의 사실과 진술들 을 10자로 압축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는, ‘무궁화의/꽃이/ 개화 했다(피었습니다)’로, 10자룰의 규칙을 따르고 있다. 첫 말인 ‘무궁화’는, 기(起)이고 ‘꽃이’는 승(承)이며 ‘피었’은 전(轉)이며 ‘습니다’는 ‘결(結)’의 형식을 띠 면서 긴장감을 돋운다. ‘피었’의 상태가 생사가 결정 되는 긴박한 순간이다. 

1993년 발표된 김진명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 다’는 박정희정부의 핵개발을 다루고 있으며, 무궁화 꽃은 ‘핵무기’의 암호였다. 무궁화는 이 땅의 국화(國 花)이기도 하지만, 히로시마에서 실현된 버섯구름이 암시되면서 음산한 기분을 돋우는 ‘제목’이 되었다. 핵은 대량살육 공포의 상징이기도 하다. ‘오징어게 임’에서 이 말은 엉뚱한 방식으로 살풍경을 만들어냈 다. 천진한 소녀의 목소리로, 잊지 못할 공포를 만들 어낸 ‘10자’의 솜씨. 이것만은 잊기 어렵다. 


3면-달고나

3면은 ‘달고나’다. 배고픈 시절 불량음식의 ‘추억 돋는’ 기억을 소환하는 장면이다. ‘달고나 게임’을 핵심지면에 배치한 까닭은 긴장을 어이없이 풀어버 리는 우스꽝스러움이 오히려 깊은 인상을 남기 기 때문이 아닐까. 

달고나 속에 찍혀있는 도형을 온전한 형태로 추려내는 일은 현실 속에서는 작고 사소한 일이지만, 여기선 생사가 걸린 게 임이다. 스스로 선택한 도형에 따라 난이도가 결정되는 상황이라, 출제 (出題)를 미리 파악하는 부정이 저 질러지고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편 법들이 횡행한다. 

편집자에게 이 게임은, ‘쉬운 것이 이 긴다’ ‘먹방은 실패하지 않는다’라는 이 두 명 제를 떠오르게 한다. 달고나 속의 도형을 뽑아내는 일은, 도형이 복잡하지 않은 것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편집의 제목은 쉬운 게 강 력하고, 편집의 디자인은 쉬운 데서 매력이 발생한다. 특히, 편집의 기법인 ‘도려내기(크롭-트리밍, 일본어 로 누끼라고도 부른다)’는, 이정재가 우산 도형을 게 걸스럽게 혓바닥으로 핥아내는 ‘한땀 한땀 녹이기’ 공력만큼 정교하고 피말리는 작업을 수반한다. 일본의 방사능 누출이 심각하다는 보도가 쏟아진 이튿날 아침 이웃 국가인 한국에서 비가 내렸다. 이 때 달았던 제목이 ‘오늘 비가 무서웠다’였다. 많은 사 람들의 관심사가 이미 공유되어 있는 상황에서, 그 불안감의 일단(一端)을 살짝 드러내는 쉬운 헤드라 인이 바로 이것이었다. 

달고나게임은, 살벌한 가운데 벌어진 초긴장의 ‘먹 방’이다. 편집도 가끔 ‘먹방’이 필요하다. ‘다시 끓어 오른 냄비 속 전쟁’으로 표현된 라면 한 가닥의 편집 은, 백 마디 설명을 아웃시킨다.


4면-줄다리기

4면은 줄다리기다. 줄다리기의 핵심전력은 ‘힘’의 우위다. 힘이 약한 팀이 강한 팀을 이기는 방법은 뭘 까. 그 지혜를 찾아내는 것이 승부의 포인트다. 여기 에서 보여준 것은, 지는 척 해주기다. 상대편이 거의 이겼다고 방심할 때 역습을 하는 게 핵심이다. 팀이 철저하게 호흡을 맞춰 그 전략을 극대화하는 게 중 요하다고 영화는 귀띔한다. 

전 직장에서 쇠락한 스포츠신문을 인수한 뒤, 내게 그 편집사령탑을 맡긴 적이 있다. 인수 당시 판매부 수가 급감하여 초비상이었다. 긴급하게 투입된 나는 몇 개의 새로운 원칙을 세웠다. (1)스포츠신문의 익 숙한 형식이던 1면 ‘황색컷 제목’을 없앨 것, (2) 신문 의 기조 컬러전략을 열정의 ‘레드’로 할 것, (3)과감한 스토리 중심기사를 메인으로 올릴 것 (4) 디자인, 그 래픽, 일러스트의 집중활용. 이런 것들이었다. 당시 선정적이고 강력한 요소들을 중시하던 스포츠신문 의 흐름을 바꾸려는 시도였다. 

0.1초를 훔친 천재, 요즘 우린 박태환 때문에 산다, 지성이 심정 아세요,와 같은 낯설고 부드러운 지면이 잇따라 등장했다. 정확하게 3개월이 지난 뒤, 신문사 의 지역 판매장들이 상경해 판매부수가 급증했다고 감사를 표시했던 ‘역전극’이 일어났다. 

이런 승부의 기적은 주말섹션 위크앤을 만들 때도 벌어졌다. 당시 주말판의 경우 경향신문의 ‘매거진X' 로 거의 평정됐다. 편집팀장으로 발령난 나는, 10여 명의 편집국 기재(奇才)들을 직접 골라 ’양산박‘팀을 만들었고 매주 농담클럽처럼 진행된 브레인스토밍 에서 나온 의견을 중심으로 섹션을 만들었다. 6개월 만에 주말섹션의 왕좌를 차지했고 새로운 흐름을 만 들어냈다. 죽어가던 시장이 벌떡 일어나는 경험. 문 제는, 독자와의 줄다리기를 해내는 지략과 통찰과 부드러움이었다. 


5면-구슬치기

5면은 구슬치기다. 10분 동안 폭력을 쓰지 않고 상대 의 구슬 10개를 따내면 이긴다. 구슬 모두를 잃으면 게 임에서 탈락한다. 왜 영화는, 게임이 무르익어가는 다 섯 번째 판에, 하필 구슬치기를 배치했을까. 달고나와 줄다리기는 어쨌든 살벌한 게임 속에서도 ‘동지’를 발 견하는 과정이었다. 구슬치기는 2인1조로 구성되면서 짝을 짓도록 한다. 사람들은 게임의 형식을 알 수 없었 기에, 자신과 가장 마음이 잘 맞는 사람을 택한다. 알고 보니 자신의 상대를 죽이고 올라가야 하는 게임이었 다. 짝은 동반자가 아닌 필사의 경쟁자가 되었다. 이 게 임을 통해, 모든 사람들의 인간관계는 완벽하게 파탄 이 난다. 짝은, 공포의 살인자로 변했다. 

이 구슬치기는 ‘깐부’라는 말을 유행어로 만들어냈 다. 성기훈과 대결한 노인 오일남이, ‘우린 깐부잖아’ 라고 말을 하면서다. 단짝을 의미하는 이 말은, 관계 의 신뢰를 담은 어린 추억이 담긴 말이지만, 실상은 저마다 깐부를 배신하고 서로 속이고 살아남으려 몸 부림친 잔혹한 인간관계였다. 5면은 이 유행어 하나 로 편집의 진수를 선보였다. 

1990년대 초창기 스포츠면을 편집할 때, 나는 한 국 신문 처음으로 ‘X세대’라는 말을 썼다. 당시 서태 지로 대변되는 괴물같은 신세대를 뭐라고 불러야할 지 아리송하던 시절이었다. 미국에서 유행어로 쓰이는 이 말을 찾아내, 스포츠면 톱 제목에 담았다. 당시 부국장 데스크는 낯선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 었다. 그 무렵 미국에서 막 돌아온 특파원이 그 자리 를 지나가다가, “오, 엑스세대! 이거 외국에선 벌써 유행하고 있는 말이예요”라고 했다. 이 말이 힘이 실 려, 젊은 편집기자의 ‘이상한 제목’이 지면으로 나가 게 되었다. 이 말이 6개월도 안되어 시골의 할머니도 알게되는 낱말이 될 거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6면-징검다리

6면은 징검다리다. 여기엔 허방다리(함정)가 나온 다. 정상적인 길처럼 보이는데 구덩이를 파고 나뭇가 지로 가려놓아 주로 짐승을 잡는데 쓴 사냥 덫중의 하 나다. 두 개의 다리 중에서 하나는 허방이고 하나는 진 짜다리다. 복불복의 선택에서 살 확률을 늘리는 것은, 앞에서 상대방이 실수를 해서 확인해주고 죽어주는 것 이다. 앞사람을 희생양으로 살아남는 게임이다. 유리 표면으로 허방을 가려내는 기술자가 등장하고, 복수 를 위해 논개처럼 옥쇄(玉碎)하는 여성도 나온다. 여기선 편집 금과옥조 하나가 지나간다. 기술을 발 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실수를 없애는 것이 훌륭한 편집이다. 오래전 ‘바로잡습니다, 19금’이란 칼럼을 쓴 적이 있다. 그날 단군 이래 가장 야한 오자 (誤字)를 냈기 때문이다. 교육면 기사의 부제목에서 ‘자치단체’라고 해야할 것을, 후배 편집기자가 점 하 나를 빠뜨리는 바람에 ‘자X단체’라고 내보내고 말았 다. 판이 막 돌아간 상태였는데, 오자를 발견한 여기 자가 얼굴이 벌개져서 담당 편집기자에게 달려갔는 데, 말로 표현하지도 못하고 “이거,이거”만 연발하는 사태를 빚었다. 급히 희대의 국민성희롱 오자를 잡아 내긴 했으나, 이미 인쇄가 끝난 것들은 엎질러진 물 처럼 주워담지 못했다. 이 장면은 허방을 밟고 벼랑 아래로 떨어진 오징어게임자의 최후를 방불케 한다.


 7면-오징어게임

마지막 승부처인 7면은 오징어게임이다. 영화제목 이기도 하다. 이때 지표에 그려진 오징어는 ‘산 오징 어’가 아니라, 죽여서 압착한 건(乾)오징어 모양이다. 이미 삶에 짓눌려 죽음과 다름없는 삶을 사는 존재 들을 암시한 것일까. 이 영화를 상징하는 도형 ○□ △은 오징어게임의 선(線)들에서 나왔다. 

○은 게임의 시작과 끝을 상징하는 포인트를 표시 할 때 쓰는 그림이다. △은 오징어의 머리이며, □은 오징어의 몸체이다. 진행요원 중에서 □는 관리자(몸 통)이며 △은 병정(두뇌)다. 그리고 ○은 일꾼(말단) 이다. 그들은 모두 오징어의 원래 빛깔인 붉은 옷을 머리끝까지 걸치고 있다. 요원들이 자신의 형체도 없 고 이름도 없이 오직 오징어의 부위를 가리키는 도형 부호 하나만으로 분류되는 까닭은, 생명성과 인간성 이 압착되어 건조되어 오직 기능과 역할로만 움직이 기 때문이다. 한치 망설임도 없는 기계적 살육이 일 어날 수 있는 까닭은, 그들이 오징어의 한 부위일 뿐 이기 때문이다. 편집자들이여. 나날의 도표 속에서 이 그래픽만한 상징과 메시지를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반면 게임 참가자들이 받아 걸친 녹색 트레이닝복 은, 인간의 개성과 존엄이 압수당한 무방비 상태의 피험자(彼驗者)이거나 오직 하나의 빛깔로 통일된 경마용 생명체임을 상징한다. 한편 천장에 매달린 빛 나는 돈통은 황금돼지로 상징된 위대한 물신(物神) 의 정점이다. 456억은 455명의 목숨으로 채워져 1명 의 손에 들어간 혈탑(血塔)이다. 다시, 편집자들이여. 저 색깔과 상징물만큼 각인효과가 있는 각종 양극화 경제의 인포그래픽들을 준비하고 있는가. 

이 영화는 한국의 상상력을 세계로 끌어낸 흥행 대작이다. 영화 오징어게임 편집자는 우리 마음 속 에 도래해있는 괴물과 광기의 메타버스를 적출해 보 여줬다. 편집은 훌륭했으나, ‘저 돈은 어떤 이들의 죽 음값’이란 섬뜩한 메시지는 대수롭지 않게 소비되었 다. 누구 하나, 제 마음을 까뒤집어 보며 부끄러움이 나 뉘우침을 심각한 통증으로 말하는 이는 없었다. 전세계 ‘오징어게임 신드롬’은 대한민국 자부심과 자 괴감의 딱지치기다. 7개면의 디스토피아를 천지창조 한 신(神)은 경전의 첫구절에 무슨 말씀을 남겼을까. “태초에 456억이 있었다.”

아주경제 편집총괄 겸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