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서혜진 세계일보 차장

 

그대 안녕하신가요?

햇살 가득한 가을 아침, 문득 그대 생각이 났습니다.

10월만 되면 그대와 함께했던 추억들에 한동안 가을앓이를 했었죠.

그리움인지 아픔인지 한동안은 알지도 못한 채 끙끙 앓다가 

결국은 사랑을 놓친 자기연민임을 깨달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누구보다 가난한 연인이었던 우리가

계절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걷는 것이었죠. 손을 잡고 걷고 

또 걷다가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잠시 쉬기도 했던 그 길들이 지금은

어디였던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여섯 번의 가을 동안 

걷던 길을 또 걷기도 하고 때론 낯선 길로 나설 때도 있었죠.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그 길로 나서면서도 

그땐 하나도 두렵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길을 보았는지 당신을 보았는지, 당신과 함께했던 계절의 향기를 즐겼는지 

사랑에 빠진 내가 좋았는지 지금은 가물가물합니다. 

무엇이든 좋았던 건 사실이니까요. 참 좋았어요.

어리고 여리고 밝던 내가, 당신으로 인해서 더 아름다울 수 있었던 내가 

참 좋았습니다. 곽재구의 ‘포구기행’을 읽다가

“당신 지나간 시절은 아름다웠는지요”라는 대목에서

문득 당신이 떠올랐습니다. 급하게 편지를 쓰고 싶었어요.

깊게 마음을 나누고 이별을 한지 어느새 20년이 넘었네요. 

당시에는 이별 후에 또 다른 삶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 시절이 내 삶의 빛바랜 카테고리가 되었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말이죠.

당신의 지나간 시절은 아름다웠는지요?

긴 시간을 돌아 40대가 된 지금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있나요?

나의 40대는 생각만큼 아름답거나 풍요롭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설익은 단풍처럼 이 바람에 꺾이고

저 바람에 휘날리며 온몸을 부여잡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삶이 녹록지도, 

과히 품위 있지도 못하다는 것을 많이 느끼면서 말이죠. 

그나마 계절의 변화에 마음을 내줄 수 있는 것도

추억의 힘이라는 것을 이제와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거쳤던 청춘의 사랑이 콕 박힌 가시처럼 내내 따끔했습니다.

그러다 고단한 생활에 산화되어 버린 듯 했는데

어느 순간, 사랑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자양분이 되어 있더군요.

그 깨달음으로 또 다른 사랑도 겪고, 부모로서, 또 자식으로서, 

친구로서, 자연의 일부로서 비루한 삶을 사랑하게 된 것도 같습니다.

내게 사랑을 가르쳐준 당신께 뒤늦은 감사를 전합니다. 

당신과 주고받던 무수한 편지들 속에 담겼던 

우리들의 계절이 이제야 조금은 아름다웠던 것 같습니다. 

 너무 아파서 다시는 그런 마음 품지 않으려 했던 다짐도 세월 앞에서 

어느새 녹아버렸네요. 당신도 나처럼 조금은 여유를 되찾았길 바랍니다. 

이별이 아파서 당신으로 인해 행복했던 기억마저 

오랫동안 되뇌지 않았는데, 이제는 살포시 미소도 떠오르네요.

내내 행복하시길^^

 

서혜진 세계일보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