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2019년 가을. 홍콩의 민주화 시위가 한창일 때. 광주일보는 1980년 5월 광주 금남로 공수부대원들의 만행을 담은 사진과 홍콩 경찰의 폭력 장면을 담은 사진을 나란히 편집했다. 두 도시에서 일어난 광경은 39년의 시간 차이에도 불구하고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홍콩 시민들은 거리와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며 5·18을 상징하는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거리와 집과 사무실, 언제 어디서도 총탄이 날아올지 모르는 불안감이 흐르는 곳. 도시를 질주하는 장갑차의 굉음 사이로 공포가 흐르는 도시. ‘임을 위한 행진곡’은 지금 미얀마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이후 반(反)군부 시위 탄압으로 숨진 시민은 이제 700명을 넘어섰다. 


미얀마 군경은 과거 한국 군사정권의 행태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 같다. 유신정권이 체제를 옹호하기 위해 유정회를 국회 3분의 1의 의석에 배치한 것처럼, 미얀마도 국회의원 25%를 군부가 가져간다. 군사정권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반공 이데올로기를 활용했듯이, 이들은 소수민족 탄압으로 모든 문제를 덮어 버린다. 이들이 내세우는 이른바 ‘미얀마식 사회주의’는 과거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수사와 판박이처럼 닮았다.


권력에 눈 먼 정치군인들이 국민이 쥐어준 총을 거꾸로 잡으면 얼마나 잔인한가. 민주화를 외치는 자국민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미얀마는 1980년 광주와 똑같다. 지난 3월 27일 ‘미얀마군인의날’에 이들은 유탄발사기와 박격포 등 중화기를 사용해 110명이 넘는 시민을 학살했다. 시민들이 통곡할 때 군부 지도자들은 흰색 제복에 나비넥타이를 매고 웃으며 레드 카펫 위를 걸어 다니는 호화파티를 벌여 세계인의 분노를 샀다. 1980년 광주에서 계엄군은 수류탄에 헬기사격을 하고 벌컨포까지 쏘았다. 계엄군의 집단발포로 금남로에서 55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5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한 그 날은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또 항쟁의 마지막 날인 27일 새벽에는 전남도청 건물 앞마당에 수십 명의 시신과 체포된 시민들이 엉켜있는 상황에서 계엄군 지휘부인 박준병, 소준열 등은 어깨를 두드리며 악수하고 활짝 웃는 장면을 스스로 카메라에 담았다. 광주일보는 이 사진에 ‘가슴에 확인사살 얼굴엔 살인미소’ ‘광주가 통곡할 때 이들은 웃고 있었다’라는 제목을 뽑았다.


10일간의 광주항쟁은 수많은 시민들의 참혹한 희생 속에 끝이 났다. 그러나 ‘살아남은 자의 슬품’이 있었기에 7년 뒤 6월 항쟁으로 되살아날 수 있었다. 여기에는 힌츠페터, 팀 셔록 등 외신기자들의 목숨을 건 헌신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1980년 총칼 앞에 언론의 자유가 무력화 될 때, 광주시민들이 기댈 곳은 외국 언론밖에 없고 외신기자들만이 진실을 알리는 희망의 창구였다. 우리 언론이 미얀마인들의 미래와 연대해야 하는 이유다. 


다시. 5월이 온다. 5.18은 이제 광주를 넘어, 한국을 넘어, 아시아 민주화운동의 롤 모델이 됐지만, 41년이 지난 지금도 화두는 여전히 ‘진상규명’이다. 강산이 네 번 바뀌고도 1년이 더 지났지만 진실은 아직도 어둠 속에 묻혀있다. 편집기자들은 도대체 언제까지 발포명령, 암매장, 집단학살, 계엄군 이런 끔찍한 단어들을 붙잡고 제목을 고민을 해야 할까. 

광주일보 유제관 편집1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