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진실도 떠오를까’라는 제목을 기억하는가? 천안함이 침몰 17일 만에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자 수많은 의문과 가능성이 함께 떠올랐다. 단 일곱 글자에 무수한 의미를 함축한 이 제목은 16회 한국편집상 대상을 수상했다. 편집은 가슴을 울리고, 미소를 머금게 하는 힘이 있다. 해학과 풍자를 절묘하게 녹여낸 역대 한국편집상 수상작들은 ‘격’을 갖추고 있다. 

함께 D·R·I·V·E 두 번째 기획 ‘Remeber’ 편에서는 편집기자들의 기억에 교과서처럼 남아있는 주요 수상작들을 살펴본다. 


새 밀레니엄 시대의 첫날 백지신문

기사 대신 사망자 명단으로 채운 1면 

 

◆기사는 어디에? ‘충격’을 준 두 작품

26년 역사의 한국편집상 수상작 200여 편 중 가장 충격적인 작품을 꼽으라면 이 작품이 빠질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일보 2000년 1월 1일자 백지 1면(6회 수상작·이주엽 기자). 제호 아래 텅 빈 1면에 ‘2000년 1월 1일’이라는 날짜를 제외하고 텍스트는 모두 철수했다. 비어있지만, 비어있지 않다. 비움을 통해 2000년 새 밀레니엄 시대에 ‘새로운 시작’을 각자가 채워보라는 의미가 아닐까.

대한민국을 깜짝 놀라게 한 또 한편의 작품은 25회 한국편집상 대상 수상작 경향신문의 ‘오늘도 3명이 퇴근하지 못했다’(장용석 차장, 이종희·김용배 기자)이다. 깨알 같은 글자 사이로 담담하게 흐르는 세로 제목 한 줄과 거꾸로 떨어진 안전모, 그리고 바닥을 흥건히 적신 피. 김용균이라는 이름을 발견하는 순간, 중대재해 중 주요 5대 사고로 사망한 노동자 1200명의 명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편집국 조직이 유연해야 사고의 틀을 깨는 신문을 만들 수 있다. 


점자와 수어로 표현한 따스한 언어

고정관념 깬 대한민국 최고의 작품들


◆파격, 고정관념을 깨야 보는 재미가 있다

큰 이슈가 있을 때, 신문들을 살펴보면 각자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색깔을 읽을 수 있다.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풀어내느냐가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되자 다음날 신문들은 각자의 이념과 시각에 따라 다른 메시지를 담아 보도했다. 

중앙일보의 선택은 독특했다. 23회 대상 수상작 ‘헌법, 대통령을 파면했다’(이진수 차장)는 헌재의 탄핵 선고 요지를 1면 전면에 실었다. 헌재 결정에 이러쿵저러쿵하지 않고, 독자의 판단에 맡겼다. 박근혜 대통령 사진을 이날 신문 중 가장 작게 쓴 점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불미스럽게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는 대통령에게 수치스러움까지는 주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언어를 다르게 표현한 작품들도 있다. 

25회 대상 수상작 동아일보 <밤 10시 수능 끝! 271쪽 점자 문제 다 풀었다>(김남준 차장)가 대표적이다. 시각장애인이 무려 13시간 동안 점자로 된 수능 시험을 다 풀고 난 뒤의 소회를 점자로 구현해냈다. 편집기자는 긴 시간 동안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낸 학생의 마음을 어떻게든 전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일상의 언어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학생이 읽을 수 있는 언어로 제목을 썼다.


“편집기자의 상상력은 독자의 마음을 훔칠 수 있다”

8회 수상작 경향신문 <아빠, 사랑해요>(김상민 기자)에도 따스함이 담겨있다. 청각장애인인 아빠와 대화하고 싶은 ‘세 살짜리’ 아들의 간절함을 지면에 담아냈다. '아빠, 사랑해요’라고 수어로 말하는 아들의 모습을 미술기자가 그렸다. 말보다 사랑이 먼저 전해져온다. 

편집기자의 상상력은 독자의 마음을 훔칠 수 있다. 11회 수상작 국제신문 <유쾌한 거짓말이 그립다>(김성한·이재민 기자)는 만우절에 아주 유쾌한 지면을 선보였다. 

거짓말하는 정치인들 DNA를 분석해보니 ‘양치기 소년 후손들’로 판명 충격, 대마도가 한국 땅에 편입, 당시 일본 총리였던 고이즈미가 독도 도발에 대해 사과하며 눈물 흘리는 사진 등. 만우절 거짓말 같은 이야기지만 기분이 좋아진다. 


◆'품격’을 높이면 독자는 ‘감격’한다

언어의 품격을 높인 작품들을 살펴보자. 편집기자는 필요 이상으로 흥분해서도 울어서도 안 된다. 감정조절이 중요하다. 

21회 대상 수상작 조선일보 <세살 아이 받아준 곳, 천국밖에 없었다>(박미정 차장)는 가슴을 시리게 한다. IS 위협을 피해 부모와 함께 난민선을 타고 지중해를 건넌 세 살짜리 아기 쿠르디가 무슨 죄가 있어서, 안타까운 죽음을 맞았나. 극도로 절제된 문장 속에 ‘천국’이라는 단어 하나로 담담하게 감정을 이입했다. 편집이 먼저 울면 독자를 울릴 수 없다는 점을 편집기자는 알고 있었다.

8회 수상작 스포츠서울 <못 일어나서 죄송합니다>(이상표 기자)는 ‘코미디 황제’ 이주일이 타계하자 그를 추모하는 기사에 달린 제목이다. 이주일의 생전 유행어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를 상기시켜주는 제목과 함께 그가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을 역설적으로 실었다. 

22회 최우수상 수상작 광주일보 <광주는 ‘임’을 부르고 싶다>(유제관 부장)는 오월의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광주의 한을 표현했다. 2016년 당시 국가보훈처는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불허했다. 분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편집기자는 ‘임을 위한 행진곡’ 원본 악보를 1면에 싣고 독자들과 함께 ‘임’을 노래했다. 


◆다른 선택으로… 급이 다른 수상작의 ‘자격’

선거 시즌이 되면 가급적 팩트만 전달하는 제목들이 넘친다. 이때 다른 시각으로 핵심을 찌르는 제목은 독자의 가슴을 파고든다.

13회 대상 수상작 동아일보 <高, 스톱.>(김수곤 차장)이 그렇다. 2007년 당시 대선주자 ‘빅3’로 꼽혔던 고건 전 국무총리가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편집기자는 선거판을 마치 화투판처럼 묘사하고 “여기까지”를 재미있는 제목으로 만들었다. 특이한 점은 ‘스톱’ 다음에 ‘마침표’다. 신문제목에 쓰이지 않는 마침표를 활용해 ‘스톱’에 확실한 방점을 찍었다.

정확히 10년 후 동아일보에서 비슷한 유형의 수상작이 또 나왔다. 2017년 유력 대선 후보로 꼽혔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대선 레이스 절반도 못 뛰고 불출마를 선언했다. 고 전 총리의 ‘高’처럼, 반 전 총장의 ‘반’도 힌트가 됐다. 반 총장의 굳게 다문 입, 중도하차를 암시하듯 감고 있는 눈 위로 흐르는 <반도 못 뛰고>(박재덕 차장)는 23회 최우수상 수상작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