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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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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어제의 뉴스’, 어제의 지면을 잊어라' 30년간 수없이 되뇌었다”
    작성자 대표 관리자 (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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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21-03-03 11:2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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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49

    세계일보 김철수 부장 


    1991년 경력직으로 세계일보 입사

    편집부서만 근무 '오리지널 편집맨'

    활자·대지발이·CTS 등 모두 경험해 

     

    매일 전장 나서는 용사의 심정으로

    제목 달고 지면 구성 '치열한 삶'

    최선 다해도 늘 부족함·아쉬움 남아 

     

    1998년 초보 간사시절 전의 불태워

    당시 5개 회원사 돌아가며 회장 맡아

    간사회의서 문제제기... 직선제 관철 

     

    2015년 첫 시집 '꽃 피니 사랑...' 상재

    최근 두번째 '세월 가니 사랑별...' 펴내

    각박해진 세상 속에서 사랑 가치 고찰 

     

    편집부도 고령화… 퇴직자 줄이을 것

    구심점인 협회가 '경력자망' 구축해

    유능한 인력의 재사회화 노력해주길




    “편집 30여년 인생은 한바탕의 꿈이었다.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고자 애쓰고, 힘들 땐 별을 보고 다시 울음 울고, 용기를 얻고, 또 꿈을 그리고….”

    매일 마감에 쫓기는 전쟁 같은 삶. 30년이 넘게 그 치열함 속에서 단 한 번의 이탈도 없이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고단했던 각자의 인생 속에 서 달리 표현되겠지만 그 중심에는 ‘꿈’이라는 큰 희망이 떡하니 자리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참 빠르게 지나간 듯 느껴지지만 누구에게나 더디고 숨 가쁘고 고단했을 삶. 그 삶도 ‘변화’를 만나 우리에게 늘 새로운 인생을 선사한다. 퇴직 이후의 더 멋진 인생을 꿈꾸며 ‘삶의 환승역’ 위에 선 세계일보 김철수 부장을 만나 30여년의 긴 편집인생을 함께 되돌아 봤다.


    ◆편집기자, 시인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멋진 인생을 살아 오셨다. 간단히 자신을 소개해달라.

    대구 경북일보에서 1988년초 입사해 편집 외길을 걸어왔다. 처음엔 교수가 꿈이었다. 모 국립대학교 조교(학보사 담당)로 2년 넘게 일하다가 선배의 권유로 경북일보 시험을 보게 되었다. 신문사 창립멤버로 들어가 참 많은 고생(?)을 했는데 나중에 상당히 도움이 됐다. 1991년도에 당시 서울신문에 근무하시던 선배의 소개로 경력직으로 세계일보에 들어와 줄곧 편집부에만 근무한 오리지널 편집맨이다.

    시는 고교때 학생문학회를 직접 만들고 초대회장을 지냈는데, 문학 불모지라 문학의 밤·시화전, 회지발간 등 직접 몸으로 뛰며 활동했다. 그때부터 틈틈이 시를 써 오고 있는데 벌써 시집을 두 권이나 발간해 나름 성과를 거두고 있다.

    몇 년 뒤 한 미술계 인사가 찾아와 신문도 좋지만 미술분야도 공부해보고 취미로 가져보라 해서 세 번이나 사양하다가 ‘그래 미술도 공부 해보면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결심으로 프랑스 화가인 쥘레 게시 공동 디렉터를 3년째 맡아 퇴근 후 시간 나는 대로 도와주고 있다. 물론 무보수 자원봉사 일이지만 많은 문화계 인사를 알게 되어 문화적 인간으로 변모하는데 커다란 동인이 되었다. 지역언론인회장과 유명인사 일부와 친구가 만든 포럼대표 등도 맡고 있다.


    ◆30년을 달려온 편집인생이 어느덧 환승역에 진입하고 있다. 지금의 심정은.

    대부분 사람들이 느끼는 바이지만 세월이 정말 너무 빠르다. 벌써 30년이라니…. 솔직한 심정으로 좀 시원하고 섭섭하고 평온하고 한편으론 두렵다. 활자와 대지발이, CTS 등 모든 것을 거쳐 온 지난한 편집인생 이었지만….

    세계일보에 막 와서 맡은 지면은 오피니언 면이었다. 당시엔 4페이지나 돼, 정말 눈코 뜰 새가 없이 바쁘고 분주한 하루하루를 보냈는데 편제방식도 대지발이라 신경을 많이 써야 했다. 또 야근상황엔 여지없이 기사가 싹 바뀌는데 이리 뛰고 저리 뛰어 겨우겨우 면을 마크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렇게 했나 싶다. 

    그 후로 CTS 방식이 도입 되어 그걸 익히는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 기계치인 나로서는 열심히 배우는 수밖엔 별 도리가 없었다. 요즘엔 기술도 많이 발전해 컴퓨터로 빠르게 기사 변환, 제목 변환, 스타일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지만 활자와 대지발이를 거쳐 온 나로서는 정말 편집 30여년이 감개무량하다. 아무리 기술이 급속도로 진보하지만 근본은 사람이다. 사람이 제목을 뽑는다. AI 시대가 오더라도 인간적 사랑을 바탕으로 한 따뜻한 가슴과 번뜩이는 아이디어는 불변의 진리가 되리라 확신한다.


    ◆일하면서 가장 가슴이 벅찼던 순간이나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무엇인가.

    솔직히 특종은 외근부서 기자의 당연한 몫이라 사실은 배가 좀 아프다. 물론 특종 기사를 발굴 하고 정성 들여 기사를 쓴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지만 생각해보라. 편집자가 그 기사를 최적화하고 좋은 재목을 뽑고 멋진 와리스케(지면설계)로 빛나게 하지 않았다면 특종상이 가당키나 하나.

    세계일보는 특기팀이 상당히 특화 되어있어 특종을 많이 했다. 나름 그 기사를 어떻게 하면 더 가치있게 만들 수 있을까 상당히 많은 고민을 했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지만 특종상으로 떠들썩 할 때마다 편집부원인 나로서는 커피 한잔을 쓸쓸히 마시며 지면이 빛나고 가치로웠구나하는 생각으로 스스로 위안을 삼았던 것 같다. 


    ◆편집철학이 있다면 무엇인가. 또 후배들과 공유하고 싶은 편집 노하우를 말해달라.

    철학이라 하면 너무 거창하고 고답적이다. 그냥 맡은바 그날 지면에 최선을 다해 혼을 불어 넣었다. 뉴스 흐름을 알기 위해 모든 신문을 읽고, 방송 뉴스도 체크하고, 교양서적도 틈틈이 읽고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이 도움이 되었고 나름 규칙이 된 것 같다.

    또 “어제의 뉴스와 어제의 지면을 잊어라” 속으로 수없이 되 뇌이면서 매일 전장에 나사는 용사의 심정으로 제목을 달고 지면을 구성했다. 그렇게 최선을 다했어도 늘 부족하고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도 부족하면 집에 가서 인터넷으로 주요기사를 모두 읽고 이해하고자 애썼다.

    자연히 새벽형 인간이 된 것 같다.


    ◆ 30년의 시간을 되돌린다면 다시 편집기자 일을 할 것인가. 

    편집기자? 사실 그렇게 재미있는 일은 아니지 않나. 편집기자의 역할과 중요성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신문이 나오면 1면 톱을 보고 대개는 판가름한다. 가독성이나 수려한 지면은 그 다음이다. 취재, 기사작성, 송고, 데스킹, 편집, 교열 등 모든 과정이 물 흐르듯 유기적으로 연결돼야 하나의 신문으로 탄생한다. 그 막중하고 엄연한 진리는 불변이다. 참으로 위대하기까지 하다. 이런 막중한 역할을 한번 겪어본 사람으로서 다시 한다는 것은 정말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도 많은 후배들이 보고 있는데 안한다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웃음).

    30여년을 하다 보니 이제 모든 게 보인다. 그 혁혁한 일련의 순환과정의 정점엔 우리 편집부가 있다는 건 묵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 혹시 기억에 남는 지면이나 제목이 있는가.

    글쎄 알알이 주옥같은 지면이라. 제목도 혼신을 다해 뽑아서 바닷가 모래알 같고 구름 같다.

    또 만족을 못하고 소주잔을 기울이게 한 지면도 부지기수다. 뭐가 좋고 나쁜 것도 없다. 담담히 하늘을 보고, 햇살도 보고 지나는 바람에 얼굴을 묻고 소크라테스 동생 폼으로 자뻑의 무량가치를 느끼고 순행 해온 것 같다. 모두가 아름답고 그냥 모두가 슬프다.


    ◆협회 집행부 활동도 하는 등 협회와도 인연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를 회상한다면.

    2000년 이전에 세계일보 간사로 활동했고 간사장으로 연임했다. 1998년 무렵인가 초보간사로 전의를 불태운 게 가장 기억이 남는다. 그전까진 편집기자 회장은 조선, 중앙, 동아, 서울, 한국 5개 메이저사가 돌아가며 독식하고 있었다. 너무 불합리하고 불공정 하단 생각이 들어 모든 회원사가 회장을 할 수 있는 체제로 만들기 위해 총대를 멨다. 온양에서 편집기자회 간사회의가 열렸는데 손을 번쩍 들고 왜 회장은 5개 메이저사만 독식하는가. 이건 고쳐야 한다. 수구고 이런 수구도 없다 일갈했다.

    당시 회장은 조선일보 P회장이었는데 처음엔 반대하다가 일리가 있다고 간사회의에서 논의해보자고 했다. 장장 8시간의 마라톤 회의 끝에 직선제를 기어이 관철시켰다. 정말 만감이 교차했다. 선구자, 혁명가는 이런 기분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분은 지금 돌아가셨지만 그 혜안과 넓은 인식에 다시 감사드리고 싶다. 한편으로 지금 이 체제로 바꾼 것에 대해 지금도 나 스스로 대견해 하고 있다.


    ◆편집기자 외에 시인으로서도 활동하고 있다. 그 계기가 무엇이며 활동에 대해 소개 부탁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국어 선생님 이었는데 문예반 지도교사도 하셨다. 수업시간에 좋은 시를 자주 소개해 주셨는데 시적 창작 열망으로 승화 되었다. 교내 문예반으로 활동하며 시를 쓰고 발표하고 문예지도 만들고 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척박한 시골에서 문학적 기반을 넓히고자 애쓴 것 같다. 지역 엘리트들을 규합해 문학동우회인 ‘영심회’도 만들고 본격 활동을 하다가 군 입대전 ‘영심회’를 물려주고 난 후 한동안 휴식기를 갖다가 40세쯤에 다시 시 쓰기를 시작해 성인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첫 시집 ‘꽃 피니 사랑 이더라’를 2015년에 상재했는데 상당히 좋은 반응을 얻어 기뻤다. 신문사 일이 바쁘고 해서 줄곧 창작만 해오다 이번에 두 번째 시집 ‘세월 가니 사랑별 뜨네’를 상재했는데 벌써 뜨거운 호평으로 기쁘기도 하고 부끄럽다. 졸작임에도 아껴줘서….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를 제목으로 각각 4편씩 지었으며, 기타 많은 실험시를 쓴 후에 10년 전부터 사랑이라는 보편적 가치에 천착해 매일 한편씩 연재 시를 쓰고 있는데 사랑 729번째를 완성했다. 급속도로 진화해가는 기계문명 속에서 세상이 아무리 각박해지고 정신이 피폐해져가도 인간의 근본인 사랑의 필요성과 가치는 점점 절실 해지는 게 아닌가 생각을 하고나니 미약하나마 나 혼자라도 사랑을 고찰하고 공감해보고 또 순수와 감성의 느낌을 나누어 보고자 사랑시를 짓고 전도사가 되고 싶었다.


    ◆본인의 시 작품중에서 후배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시가 있는가. 

    대부분 부족하고 부끄러운 졸시지만 몇 작품 애착이 간다.

     

    사랑 717

     

    굽어지면 굽어진대로/그냥 그대로

    /땀샘 눈물샘 다 열어

    /수고로운 태양을 뒤로한 채

    /국화꽃의 순애보로/

    우리/ 바보같이 미친 사랑을 해요/

     

    달이 지면/ 우렁우렁 울음 울고

    /사는 게 다 그렇다고

    /한마디 툭 내 뱉고/

    쿨하게 찐하게/우리

    /뜨거운 가슴 맞대어 봐요/

     

    연잎에 묻은/숙명의 굴레

    /모두 털어내고/

    끝없이 부서져요/

    잿빛 세상/그래도 싹이 움트면

    /나쁜 기억 벗어버리고/

    초원에 하얗게 이는 바람처럼/다시/

    하르르/무지개 꿈으로 가요

     

    사랑 661

     

    그대 너무 보고싶어/장미는 붉게 피고/

    그대 진정 그리워/달은 차오르고/

    그대 태양처럼 사모하여/심장은 뛰는데/

    속절없는 세월아/

    푸르고 푸른 강아/이 그리움/이 뜨거운 사랑/

    대체 어쩌란 말이냐


    ◆누구보다 든든한 후원자가 가족들이었을 것 같다. 가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우리 편집쟁이들의 아내처럼 슬기롭고도 현명하고 인고의 여성들이 없는 것 같다. 큰 뉴스가 터지면 꼼짝없이 야근을 해 늘 생활이 불규칙해 스스로 현명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나도 역시 그랬다.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 같아 죄스럽다. 특히 아내는 오랜 지병으로 힘들었을텐데 늘 그림자 역할을 했다. 언제나 격려해주고 믿어주고 30여년을 한결 같이 동반자로 묵묵히 도와준 덕에 대과 없이 무탈하게 신문사 편집기자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정말 가족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드린다.


    ◆편집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느 철학자가 이야기 했듯이 편집 30여년 인생은 한바탕의 꿈이었다.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고자 애쓰고, 힘들 땐 별을 보고 다시 울음 울고, 용기를 얻고, 또 꿈을 그리고…. 우물쭈물 하다 보니 덧없이 세월이 가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가진자의 만행에 더 용감하고 비리와 부정에 더 투쟁하고 그늘 진 자, 소외된 자, 가난한 사람들에게 좀 더 따스하고. 국가와 민족의 미래엔 더 맑고 밝을 걸 하는 아쉬움이 실로 크다.

     기술의 발달, 문명의 진보, 또 미디어 환경의 변화로 편집기자들의 위상도 점점 약화 되는 게 사실인 것 같다. 눈망울 초롱하고 가슴 뜨거운 후배들의 과제를 두고 먼저 일선에서 떠나게 되어 미안할 따름이다.

    편집자는 신문의 꺼지지 않는 등불이며 마지막 보루이다. 진보하는 걸음을 걷되 본연의 임무를 굳건히 하고 세류를 따라가는 노력도 아끼지 않는다면 우리 미래도 그리 탁하진 않을 것이다. 아무리 AI가 편집해도 인간적 고뇌로 판단하고 따사로운 햇살 같은 진심으로 판단하는 인간, 우리 편집기자들을 넘을 수 있겠는가!


    ◆30년 편집기자로서의 생활을 마치고 명예롭게 퇴직을 앞두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는가.

    최근에 먼저 나가신 선배들과 친구, 지인들을 만나 보니 한결같은 조언은 무조건 아무생각없이 몇 달을 쉬라는 것이다. 사실 언론인이 된 후 6일 이상 쉬어본적이 없는 것 같다. 30여년을 써먹은 나의 육체에 미안한 감도 든다. 여행이 꿈이었는데 제대로 가 본적이 없어서 일단 나만의 휴가를 가고 싶다. 몇 가지 제의도 받고 구상도 하는 중이다. 천천히 생각해 볼 계획이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격동의 시대를 함께한 우리 편집 동지들을 두고 혼자 먼저 나가니 좀 미안한 생각이 든다. 앞으로의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을 것 같은데…. 하지만 우리 후배 여러분들이 제 역량을 잘 발휘할 수 있다면 어떤 것도 능히 극복하고 꽃 한 송이 피울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 나도 2대에 걸쳐 편집기자회 간사장을 지냈지만 협회 임원들의 고충을 회원들이 잘 이해하고 도와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협회에 제안 하나하자면, 앞으로 정년을 다 채우고 나가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은데, 경력자망을 구축해 경력 많고 유능한 편집인력이 필요한 회사에 수요공급에 맞게 일자리를 소개해주면 어떨까 싶다. 편집기자협회 가족끼리 서로 돕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코로나 시대라 모이기 힘들어 소주 한잔 제대로 못하고 가는 게 좀 유감이다. 아무쪼록 몸 건강들 하시고 가족과 화목하고 뜻한 바 다 이루시길 바란다.

    편집기자 동지여러분 파이팅! 

    감사합니다.


    첨부파일 철수선배 메인사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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