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나재필의 Feel <20회>


편집은 죽었는가? 살았는가? 이 께름칙한 논제는 수용하기도, 배척하기도 난감한 시대의 물음이 됐다. ‘살았다’고 말하면 정당방위이고, ‘죽었다’고 말하면 자살이다. 그러나 속살을 들여다보면 편집은 죽은 것이 아니라 소멸 중이다. 그렇다면 누가 편집을 죽이고 있는가? ‘타살’이라고 말하면 핑계이고 ‘자살’이라고 말하면 자폭이다. 그런데 모사와 모반, 전복을 꿈꾸고 있는 피의자는 다름 아닌 아마추어리즘(Amateurism)들이다. 포털(디지털 미디어, 온라인매체),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트위터?페이스북?스마트폰 앱?블로그)로 전송되는 디지털뉴스가 원흉의 일부다.

문맹(文盲)이 사라진 문명의 시대라지만 사람들은 글을 읽지 않는다. 그냥 이미지만 본다. 글도 이미지로 읽고, 뉴스도 이미지로 읽는다. 아니 읽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라고 말해야 옳다. 그러니 다시 문맹으로 회귀한 것이다. 종이의 질감을 느끼며 시대의 흐름을 읽던 사람들은 손가락의 지문을 통해 줄글의 텍스트를 본다. 이는 정확히 뜯어보면 ‘문맹’이 아니라 ‘색맹’이다. 세상은 온통 빨주노초파남보와 흑백의 정보들로만 가득하다. 태블릿PC와 스마트폰으로 보는 글과 이미지는 이미 조루증에 걸려 가볍고 천박하다. 속사포로 소식을 전하는데 뒷맛이 개운치 않은 것이다. 그래서 ‘정보’가 아니라 그냥 ‘소식’이다.

자고로 신문은 정제된 뉴스를 부드럽게 전하는 레가토(legato)다. 하지만 이젠 군대 구호처럼 딱딱 끊어서 말하는 스타카토(staccato)식 디지털을 선호한다. 신문의 위기, 편집의 위기는 바로 애플의 스티브잡스와 플립보드의 마이크 매큐 같은 종족들이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이들은 ‘신문을 큐레이션(curation:여러 정보를 수집, 선별하고 이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해 전파)’이라고 명명하고, 신문 뉴스와 콘텐츠를 웹으로 무차별 살포했다. 기사만 생산해내면 될 줄 알았던 신문은 한방 맞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신문사는 정보를 온라인(매체)에 마구 뿌린다. 어렵게 잉태한 기사를 공짜로 내다팔기까지 한다. 정보를 팔아 그 대가로 알량한 ‘화대’를 받으니 은근짜(慇懃―)다. 추상적인 담론이 아니다. 언론(言論)은 개인이 생각을 글로 전하는 것인데, 온라인 미디어는 말(言)만 무성하지, 그 말을 논(論)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사회 환경을 감시하고 국민 대중을 계도하는 기능이 없다. 생각의 약탈이다.

한때 벗겨야 팔리던 아마추어리즘이 성행한 적이 있었다. 미디어 음란물은 홍수처럼 쏟아졌고 누가 더 성적 자극을 일으킬까 경쟁했다. 하지만 결국 정상적 상황에서도 발기 중추가 반응하지 않는 세상이 오고야 말았다. 역치(?値)다. 역치(문턱값)란 감각세포 흥분에 필요한 최소치로 비슷한 자극을 지속적으로 받으면 올라간다. 10대 걸그룹들에게 아슬아슬한 옷을 입히고 섹시 춤을 추게 하면 역치는 한껏 올라가지만 ‘정보의 수치’는 바닥이다. 그걸 받아먹는 온라인세상만 후끈 달아오른다.

편집기자가 이래서 필요하다. 편집은 저급하거나 혹은 ‘날것’의 정보들을 수집, 선별하고 ‘질적인 판단’을 추가해 부가가치를 생산한다. 게이트 키핑(gatekeeping)이다. 만약 정보유통의 관문에서 뉴스를 걸러내지 않는다면 세상은 ‘쓰레기악취’로 가득할 것이다. 뉴스는 생산(출산)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함의돼있는 잉태(콘텐츠의 함량)도 중요하다.

‘편집은 죽지 않았다’는 것은 결국 ‘편집은 죽지 않아야만 된다’는 명제와 같다. 편집을 죽이는 것은 프로페셔널리즘(professionalism)을 죽이는 일이다. 물론 편집기자가 척박한 저널리즘(journalism)의 환경에서 살아나려면 환골탈태의 재탄생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링거와 산소 호흡기에 의지한 채 언제까지 절멸의 강을 건널 것인가. 여기엔 편집기자 스스로의 책임도 크다.

춘추전국시대 말기 진나라의 정치가였던 여불위(呂不韋)는 3000여명의 빈객을 모아 ‘여씨춘추(呂氏春秋)’를 편집했다. 그는 완성된 책을 저잣거리에 걸어놓고 한 자라도 손댈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천금을 주겠다고 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일자천금(一字千金)’이라는 고사의 유래다. 훗날 고유(高誘)는 이를 두고 날카로운 촌평을 남겼다. “당시 사람들이 손댈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재상을 꺼리고 그의 세력을 두려워했을 뿐이다.”

이 고사는 ‘잘난 게’ 아니라 ‘잘난척하는’ 것을 경계하자는 것이다. 편집기자도 여불위와 같이 고루하다. ‘자부심’은 있는데 알고 보면 ‘자만심’이다. ‘불평’만 많고 시대흐름에는 ‘불감’(不感)하다. 새로운 사조에 ‘불안’해하지만 이 또한 ‘불만’일 뿐이다. 비근한 예로 1년차에 배운 ‘학(學)’을 가지고 10년 넘게 우려먹으려한다. 그러니 집착하고 천착하고 편협하다. 한마디로 ‘곤조’와 아만으로 가득 차 있다.

미증유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둔감하고 게으르면 이 통섭(융합)의 길을 갈 수가 없다. 이제 생존경쟁이 아니라, 생존방법을 달리하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