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나재필의 Feel <19회>

시인 오상순의 호는 공초(空超)로 ‘비움마저도 초월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골초’였던 시인은 ‘꽁초’에서 음을 따서 호를 만들 정도로 끽연가였고, 하루 100개비 이상(9갑 분량) 피워댄 헤비 스모커(Heavy smoker)였다. 오죽했으면 전매청이 소문을 듣고 매일 담배 10갑을 공짜로 보내줬겠는가. 오상순은 담배를 ‘세상 근심걱정을 잊게 해주는 풀’이란 의미로 ‘망우초(忘憂草)’라고 이름 지었다. 얼마나 담배를 사랑했던지 그의 묘소 상석(床石)에도 돌 재떨이가 놓여있다. 묘지시비(詩碑)는 그의 인생을 한마디로 분절한다. “몹시 담배를 사랑하다.”

정조대왕도 지독한 애연가였다. “아, 화기(火氣)로 한담(寒痰)을 공격하니 가슴에 막혔던 것이 자연히 없어졌고, 연기의 진액이 폐장을 윤택하게 하여 밤잠을 안온하게 잘 수 있었다. 강토의 백성에게 남령초(南靈草?담배)의 혜택을 베풀고, 그 효과를 확산시키라”고 흡연 장려 책문까지 내렸다. 또 과거시험 시제로 남령초의 유용성을 내걸기도 했다. 반면 송시열과 성호 이익은 담배를 ‘요초(妖草?요망한 풀)’라며, 그 해악이 술보다 더하다고 지적했다.

매년 한 살을 먹을 때마다, 난 세 가지 약속을 한다. 금연, 금주, 다이어트다. 하지만 20년 넘게 100번은 넘게 깨졌다. 흔히 얘기하는 작심삼일(作心三日)도 안됐다. 어느 통계를 보니 ‘작심삼십일’이 40%, ‘작심삼일’ 9%, ‘작심일일’이 10%로 평균 11일 만에 모두들 포기했다. 작심의 유효기간이 열흘을 간신히 넘긴 셈이다.

‘7㎝×20개비=140㎝,140㎝×365일=511m,511m×25년=1만 2775m’은 지금까지 피운 담배의 길이다. ‘2병×3일=6병, 6병×52주=312병, 312병×60년=1만 8720병’은 지금까지 마셨고 앞으로 30년간 먹을 소주병 수다.

아, 미쳤다.

하루에도 60여종의 발암물질과 4000여종의 유해화학물질을 신나게 태우고, 이틀에 한 번꼴로는 지방간을 만드는 위해물질도 신나게 들이켜고 있다.

그런데 끊지 못한다. 술을 줄이고 담배를 끊으라는 말을 듣는 순간 몸은 자동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스트레스는 코르티졸(cortisol) 호르몬을 분비하고, 이를 음식으로 해소하다보니 뚱보가 된다. 술과 담배, 비만의 역설적인 삼각관계다.

문단의 대표적인 술꾼 변영로 시인이 어느 날 금주를 선언했다. 결연한 의지를 주위에 알리려고 금주 패(牌)까지 만들어 목에 걸고 다녔다. 술자리에선 패를 상에 올려놓고 잔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후배시인들의 성화, 지인들의 ‘반 협박’에 못 이겨 금주선언을 철회하고야 말았다. 사실 작심(作心)을 해도 주변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도로 아미타불이다.

언젠가 나도 공공의 칼럼을 통해 ‘금연’을 대외적으로 선언한 적이 있다. 이뿐 아니라, 담배 피는 걸 목격하면 사정없이 뺨을 때려달라고 나름의 ‘치도곤’까지 내걸며 치기를 부렸다. 하지만 ‘삼일’이었다. 나흘째 되던 날, 아무도 보지 않는 뒷간 세 번째 칸에서 뻐끔뻐끔 담배를 빨다가 후배에게 들켰고 내 자신에게도 들켰다. 쓸쓸히 뺨을 내놓는 순간, 박약한 의지를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1만 시간의 법칙’이란 게 있다. 한 분야에서 최소한 1만 시간 동안 노력한다면, 누구나 그 분야의 아웃라이어(outliers?보통사람의 범주를 뛰어넘는 특별한 사람 내지는 걸출한 인물)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1만 시간은 하루 세 시간씩 10년을 보내야하는 긴 세월이다. 아쉽고 아프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는가. 아무리 작심삼일이라고 해도 점진적으로 하다보면 성공할 확률이 크다. 독하게 마음을 먹으면 ‘작심’이고, 독하게 굴지 않으면 그저 ‘욕심’일 뿐이다.

2차 세계대전 중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신체건강한 사람들이 힘든 수용소생활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1944년 성탄절과 1945년 신년연휴까지 불과 2주 만에 많은 수감자들이 죽어나갔다. ‘이번 크리스마스만 지나면…’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체념으로 바뀌면서 육신의 생명까지 앗아간 것이다.

지금도 난 나를 속이며 살고 있다. 변명을 하고 있다. 작심삼일은 결국 ‘내’가 ‘나’를 속이는 일이다. ‘내’가 ‘나’를 속였을 때 비로소 ‘욕심’은 ‘작심’이 된다. 아, 금주여! 아, 금연이여! 아, 살들이여! 언제쯤 이 지긋지긋한 3대악과 이별을 할꼬. (일단 담배 한 대 빨면서 생각 좀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