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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칼럼 <18회>

중앙일보 김홍준 기자


여름철, 햇볕이 뜨거운 낮 시간에는 지표면이 달구어져 아래쪽 공기의 기온이 올라가면서 지표에서 수분이 증발하여 대기가 불안정해진다. 이때 강한 상승기류가 일어나는 지역에서는 소나기 등이 나타나곤 한다. (전국 등산학교 교재 『등산1)』 58p)


한적한 산길이었다. 물기를 머금은 바람이 몇 번 몸을 훑고 지나갔다. 능선에 오르자 멀리 엷은 회색의 장막이 보였다. 장막은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나뭇잎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직하하는 그 무엇인가 난타를 당하는 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색 판초우의를 뒤집어썼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자를 써 눈가로 쏟아져 들어오는 비를 막았다. 배낭 안에는 우산도 있었지만 굳이 꺼내 쓸 필요는 없었다. 배낭 레인커버에 고어텍스 등산화까지, 웬만한 비는 다 막아주기 때문이다. 번개가 쳤다. 계곡으로 내려섰다.


산에서는 복잡한 지형 때문에 강한 상승, 하강기류 생성이 촉진돼 번개가 발생하기 쉬운 조건을 제공한다. 산에서 번개를 만나면 높은 곳을 피해 계곡 쪽으로 내려서야 한다. (『등산』 61P)


허기가 졌다. 자리를 잡고 다용도칼(일명 맥가이버칼)을 꺼내 참외를 깎고 소시지를 조각냈다. 스윽스윽, 칼이 잘도 들었다. 여자 둘이 지나갔다. 비를 쫄딱 맞으며 하산을 서두르고 있었다. 초로의 어머니와 장성한 딸이었다. 재킷도 걸치지 않았고 등산화도 신지 않았다. 그저 면 셔츠에 운동화였다. 준비도 없이, 여차여차하다 이곳까지 온 모양이었다. 딸을 둔 아버지로서 가만있을 수 없었다.

“잠깐만요.”

난 배낭에서 우산을 꺼내 건네줬다. 둘은 나를 경계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난 그들의 눈에서 발사돼 나오는 스캔의 강력한 전자파를 느꼈다. 시커먼 우의는 긴 목, 긴 팔, 짧은 다리라는 몸의 특징을 가려줬다. 펄럭일 정도로 과도하게 통 큰 바지, 쫄티에 가까운 상의도 감춰줬다. 푹 눌러 쓴 모자 밑에 번쩍이는 눈. 그리고 한 손에는 칼. 영화 ‘공공의 적’에서 봤음직한 사람 아니었을까. 순간, 나도 비범한 내 모습을 의식했다. 차마 우의까지 벗을 시간은 없어 모자를 벗었다. 둘은 더 놀라는 것 같았다. M자형의 ‘범죄형’ 이마와 매섭게 찢어진 눈, 얼굴 가죽을 뚫고 나올 것 같은 도드라진 광대뼈. 지능범을 연상케 할 지도 몰랐다. 칼은 왜 들고 있었을까. 칼날을 접으려 했다. 잘 안 됐다. 네 번 만에, 손끝에 살짝 생체기를 내고서야 칼은 접혀졌다. 피 맺힌 손끝을 입으로 쪽 빨았다.

“하하하, 별로 안 아파요.”

말을 하자 고르지 못한 치아가 드러났다. 그 사이사이에 피가 맺혀 있었다. 그들의 모든 동작들이 정지됐다.


상처 하나 없이 죽을 수 있는 게 저체온증이다. 저체온증을 느낀 지 두 시간 만에 사망할 수 있다. 저체온증은 영하의 추운 날씨에서만 걸리는 게 아니다. 한 여름이라도 비바람으로 인한 날씨 변화로 급격히 체온을 빼앗길 수 있다. 젖은 옷을 입고 있으면 평소보다 240배나 빨리 열을 빼앗긴다.(『등산』 408p)


“전 필요 없으니까 쓰세요.”

미스코리아보다 더 화사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우산을 다시 건넸다.

둘은 주저하다 고맙다며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눈썹 사이에 내 천(川)자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돌아서 갈 길을 가려했다. 그때, 내가 그들의 뒤에 비수 같은 말을 꽂았다.

“저 밑에서 기다릴 테니, 그때 돌려받는 걸로 하죠.”

그들은 내 쪽으로 확 돌더니 우산을 던지듯 돌려줬다. 그리고 도망치듯 하산했다. 나뭇잎에 고여 있던 빗물이 후두두 머리 위로 쏟아졌다. 바람이 불었다. 소나기 참 길게도 왔다. 갑자기 추워졌다.


산에서의 체감 온도는 바람과 고도에 따라 변한다. 보통 초속 1m의 바람이 불 때마다 평균 섭씨 1.6도씩 기온이 떨어지고, 높이 100m 올라갈 때마다 0.65도씩 떨어진다. (『등산』406p)


rimrim@joongang.co.kr, blog.daum.net/silentrunning


각주--

1) 대한산악연맹에서 펴낸 등산학교 교재. 김영도·이용대·정승권 등 국내 등산 전문가 18명이 집필했다. 배낭 꾸리기부터 보행법·암벽등반·빙벽등반·산악기상 등 등산에 관한 전반적 이론을 담았다. 산악인의 자세도 다뤄 등산이란 단순한 오름짓이 아니라 건전한 마음에서 발현돼 나오는 행위임을 강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