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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칼럼 <17회>

중앙일보 김홍준 기자


사진설명 스승 따라 첫 바위인 인수봉에 오른지 8년이 다 됐다. 기자가 지난 5월 25일 무의도 하나개해수욕장 암장에서 등반을 하고 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 중에는 절대 잊지 못할 사람도 만난다.

#야구-기술을 전해주다

1983년. 동네에는 토지 소유권 분쟁으로 망한 테니스장이 있었다. 그 반반하고 너른 필드는 가히 꿈의 구장이었다. 서울 강북에서 야구 좀 한다는 아이들이 죄다 모였다. 학연(초등학교)·지연(수유동)·혈연(형제)을 아우른 동네 팀을 만들었다. 어느 날, 초록에 연두 묻어가듯 은근슬쩍 아저씨 한 분이 팀에 들어와 코치를 자처했다. 미국 프로야구 싱글A에서 공 좀 던졌다는 재미동포 찰리 형. 그는 내게 세세한 야구 기술을 가르쳐줬다. 그는 한국말을 잘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잘하는 말이 있었다. 내가 조금만 나태해지거나 과하게 예쁜 동작을 구현하면 콧수염과 턱수염 사이에 숨겨진 입으로 한마디 내 뱉었다.

“지랄하네.”

찰리 형과 나는 땅거미가 질 때까지 공을 주고받았다. 이웅평 대위가 미그기를 몰고 넘어올 때, 중국 민항기가 불시착할 때 잠깐 쉬었을 뿐이었다. 우리 팀은 동네 최강으로 군림했다. 날이 더워지자 찰리 형은 모임에 뜸하게 왔다.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 때쯤, 영영 볼 수 없었다. 찰리 형이 급히 미국으로 돌아갔다는 말만 들었다. 아이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여자 때문이라며 원고지 200매 분량의 막장 드라마를 쓰는 아이도 있었다. 돈 때문이라며 한·미·일을 아우르는 대하서사극을 펼치는 아이도 있었다. 여하튼, 찰리 형은 떠났다. 그해, 형에게 배운 야구 실력을 큰 무대에서 펼칠 기회가 왔다. 정규 야구부를 노크했다. 테스트를 거쳐 입단했다. 그 이튿날, 감독이 사라졌다. 실종 혹은 줄행랑의 이유는 불분명했다. 그도 여자나 돈 때문이었나. 내 야구는 거기서 주저앉았다. 찰리 형이 그리웠다.


#농구-긍정을 심어주다

“그게 아냐.”

1985년이었다. 반 대항 농구대회를 앞두고 무작정 혼자 슛 연습을 하고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답답했던지 내게 말을 건넸다.

“슛을 할 때 마음속으로 가상의 링을 그려. 그리고 네 공이 그곳에 들어간다고 생각해. 쏙쏙 하고 말이야. 안 된다는 생각은 말고.”

나는 믿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은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라는 것이었다. 내가 당시 그런 개념을 알 리 없었다. 운동은 그저 쉴 새 없는 반복이 약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은 계속 나를 지켜봤다. 그러다 다시 내게 다가왔다. 공을 달라고 하더니 3점 슛 라인에서 계속 공을 던졌다. 열 번에 아홉 번이 들어갔다. 나는 눈이 동그래졌다.

“믿어봐.”

자기 말을 믿어달라는 거였는지, 네가 네 스스로를 믿으라는 말이었는지 헷갈렸지만 난 잠자고 있었다. 실력자 앞에서는 가만히, 가만히 못 있으면 고개만 끄덕이고 있는 게 상책이니까.

키가 유난히 큰 그는 내가 슛하는 모습을 몇 분 더 본 뒤 표표히 사라졌다.

묘했다. 귀찮아서 계산해 보지는 않았지만 슛 성공률이 놀랄 정도로 높아졌다. 며칠 뒤 연습을 하던 같은 반 친구들도 놀라서 말했다.

“너 약 먹었냐.”

일주일 뒤, 우리 2학년 16반이 농구대회에서 우승했다. 내가 결승에서 넣은 슛만 4개였다. 그 중 하나는 7m 장거리포였다. 지금도 농구공을 튀길 때마다 생각나는 그 사람, 키다리 아저씨.


# 등반-믿음을 공유하다

“등산 코스 좀 추천해 주세요.”

이렇게 시작됐다. 몇 달 뒤 이렇게 바뀌었다.

“암벽등반 좀 가르쳐 주세요.”

그는 인수봉 앞에서 만나자고 했다. 인수봉이 다방 이름인가. 인수봉 앞이라니.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인수봉 대(大)슬래브1) 앞을 말한 것이었다. 여하튼 2005년 6월 11일 오전 11시, 인수봉 앞에서 만났다. 그는 로프 묶는 법, 확보 보는 법, 하강하는 법, 구호로 소통하는 법을 알려줬다. 20분 정도 걸렸다.

“자, 가지.”

“어딜요? 집에요? 벌써요?”

“아니, 저기.”

그의 손끝은 인수봉 정상을 향해 있었다. 난 미친 척하고 따라나섰다. 실력자 앞에서는 가만히, 가만히 못 있으면 고개만 끄덕이고 있는 게 상책이니까. 그는 나보다 더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어떻게 암벽등반 입문 20분 된 나를 믿고 올라간다는 말인가. 우리는 인수A코스로 올랐다. 발이 바위 면에서 슬슬 밀렸다. 팔은 밀리는 발을 보상하기 위해 계속 무엇인가를 잡으려 애썼다. 내가 얼마나 다리를 떨었으면 옆의 등반 팀이 걱정한 나머지 이런 말을 꺼낼 정도였다.

“그 오토바이2), 배기량 얼마요?”

“무언…쏘리여요.”

나는 이해하지 못했고 말도 잘 하지 못했다. 고꾸라지고 자빠졌다. 그렇게 지옥 같은 3시간이 흘렀다. 인수봉 정상이었다. 어둑해진 하루재3)를 지나 우이동으로 내려섰다. 식당에 들러 들이켠 폭탄주가 왜 그렇게 맛나던지. 입안의 폭탄주 거품이 사라지기 전에 그에게 물어봤다. 왜 정상까지 나를 데리고 갔냐고. 그는 짧게 대답했다.

“그냥 믿는 거야. 줄4)을 묶으면.”

스승의 날에 생각해본다. 집과 학교 밖에서, 짧지만 큰 가르침을 준 사람들.

각주??

 1) slab. 경사가 있는 평평한 바위.

 2) 등반 도중 공포에 질려 저절로 다리를 떨게 되는 상황을 ‘오토바이를 탄다’고 한다. 그 상황을 빗댄 농담이었다.

 3) 도선사 주차장에서 인수봉 방향으로 넘어가는 고개.

 4) 로프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