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나재필의 Feel <12회>


#신문은 편집이다

편집기자는 외로운 박제다. 흑(黑)과 백(白)의 텍스트를 읽고 그 행간을 읽어야한다. 그 행간 속에 절절히 침잠해있는 희로애락은 곧 기자의 희로애락이다. 그러면서도 철저하게 익명이다. 유명인과 만나도 익명이고, 익명의 사람들과 만나도 익명이다. 익명의 사연들은 하나의 교집합을 이룬다. A∩B이다. 독자들에게 명쾌하게 내레이션을 해야 하니 B∩A(교환법칙)이기도 하다. 연기파 배우도 이보다 더 노련하게 남의 인생을 표현하지는 못할 것이다. 나와 살면서 동시에 남들의 인생을 사는 만능 엔터테이너다. 그래서 내 얘기가 없고 남의 얘기만 있다.

매일 천(千)의 얼굴과 1000가지 사연을 보며 갖가지 지병을 앓고 있는 이도 편집기자다. 알고 싶지 않아도 알아야하고, 보고 싶지 않아도 봐야하니 뚜껑이 열린다.(고혈압) 종일 의자에 앉아 괄약근을 혹사시키니 소화불량이 걸린다.(과민성대장증후군) 또한 헤드라인과 데드라인 사이에서 가슴을 쥐어짜야한다.(협심증?심근경색) 애인 얼굴이 아닌 컴퓨터 얼굴만 쳐다보니 눈과 손가락이 아프다.(결막염?손목터널증후군) 이 모든 스트레스를 무장해제 시키기 위해 줄담배와 말술을 즐기니 폐와 간이 아프다. 한마디로 움직이는 종합병동인 것이다.

(하지만….)

속병이 나고, 술병이 나고, 화병이 나도, 편집기자는 꽃으로 피어난다. 왜? 신문은 편집이니까. 그 한마디 때문에 산다. 그 한마디 때문에 웃는다.


#편집기자와 편집기자

편집기자만의 몹쓸 병이 있다. 편집증(paranoid)이다. 물론 정신분석학 측면에서 보는 질병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의 ‘증상’임을 조심스럽게 일러둔다. 이들은 철저하게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어, 행여 타인이 침범하면 몽니를 부리기도 한다. 이를 두고 ‘자존심’이라고 표현하는데 나는 ‘지 잘난 맛’이라는 수사(修辭)에 더 동의한다. 자부심과 자존심, 자만심은 다르다. 자부심은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믿는 마음이고 자존심은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자만심은 거만하게 구는 마음이다. 일부 장삼이사들이 외치는 자존심은 자부심이 아니라 자만심이다. 왜냐하면 타인(독자?취재부?동료, 선?후배)과의 소통이 단절돼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창살 없는 감옥에 가두고 자신을 지성의 최고봉으로 생각한다. 오만이고 아만이다. 더불어 기고만장, 안하무인이다.

선배 없는 후배 없고, 후배 없는 선배 없다. 그런데 이들은 활어시장 같은 현장에서 활극을 벌이듯 위아래와 충돌한다. 이름 하여 악마의 편집이다. 나는 이런 고집불통의 지병이 불후의 계보가 아니라 슬픈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젊은 편집기자들은 선배의 제목을 믿지 않는다. 선배의 조언을 훈계라고 생각한다. 선배를 한솥밥 먹는 동료가 아니라 술밥 먹는 존재로 생각한다. 물론 선배도 떳떳치는 않다. 선배는 후배의 능력을 믿지 않는다. 후배의 제목을 믿지 않는다. 후배를 한솥밥 먹는 동료로 보는 게 아니라 술밥 사달라고 조르는 ‘그냥 후배’로 본다. 그러니 둘 다 유죄다.


#편집기자 편집하기

뉴스거리는 크게 둘로 나뉜다. 사람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과 ‘알아야 하는 것’이 그것이다. 어느 쪽이든 모두다 뉴스가 되는 건 아니다. 수많은 정보들(쓰레기더미) 중에서 취사선택된 내용만 뉴스가 된다. 그래서 편집기자를 최초의 선택자이자 최초의 독자라고 부른다. 뉴스거리에서 뉴스를 걸러내야 하니 게이트키퍼(문지기)인 셈이다. 정보의 시대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역할이 어디 또 있을까. 그래서 자부심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프라이드(PRIDE)를 가지려면 즐거움(pleasure) 존경(respect) 발전(improvement) 위엄(diginity) 실행(effect)의 소중함을 깨쳐야한다.

흔히 속이 좁고 너그럽지 못한 사람을 ‘밴댕이 소갈머리 같다’고 한다. 밴댕이는 그물에 잡힐 때 받는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몸을 비틀며 떨다가 이내 죽어버린다. 그래서 어부들조차도 살아있는 밴댕이를 보기 힘들다고 한다. 스스로의 성질을 못 견뎌 자멸하는 밴댕이는 17℃ 이하에서만 활동하는 ‘차가운 놈’이다. 밴댕이를 생각하며 자가당착에 빠진 편집기자들에게 시일야방성대곡 심정으로 외친다.

“겸손해지자….”

‘편집’이라는 일이 3D업종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말이 종종 들린다. 일은 힘들고, 몸은 아프고, 대접은 못 받으니 ‘쓰리D’다. 이런 말들이 들릴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나는 ‘편집’을 독하게 사랑하는 사람이다. 오늘 편집기자를 독하게 ‘편집’한 이유도 그 애정을 고백하고 다시 한 번 파이팅하자는 의미에서다. 힘들고 구차해서 버리고 싶은 ‘3D’가 아니라 3차원(Three Dimensions, Three Dimensional)의 3D가 돼보자는 것이다. 그러려면 한번쯤 스스로를 ‘편집’해볼 필요가 있다. 내가 진짜 편집을 사랑하는지, 내가 진짜 편집기자로서의 역량이 되는지, 아니면 아집과 편견으로 ‘지 잘난 맛’에 살고 있는지를. 편집기자들이여 편집기자를 편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