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나재필의 Feel <6회>


1. 편집(編輯)과 편집(偏執)

1990년 초 어느 봄날 나는 ‘맥’ 컴퓨터 앞에 망연히 앉아있었다. 애플사가 만든 매킨토시(Macintosh)였는데 ‘사과’가 방점처럼 찍혀 실실거렸다. 내 등 뒤에는 세달 일찍 입사한 선배가 호랑이얼굴로 눈을 부라리며 독수리타법을 비웃었다. 마치 오타라도 치면 손가락을 잘라버릴 듯한 태세였다. 고작 세달 선임인데 삼십년 경력자마냥 굴었다. 군대보다 더 무서웠던, 편집초년병의 슬픈 하루. 어쩌면 그때 마우스를 집어던지고 뛰쳐나왔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날의 참혹했던 첫대바기가 없었다면 이후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편집과의 열애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기에.

편집과의 인연은 이렇게 에스프레소처럼 진하게 시작됐다. 그날 이후 편집은 편집증적인 마력으로 다가왔고 단박에 사랑에 빠져들었다. 편집은 ‘여자’같았다. 양팔에 찰싹 달라붙은 감성이었고, 커피처럼 쓰디쓴 미각만 일깨우고 사라지는 지성이었다. 어떤 날엔 토라져 오만하게 사라지고, 어떤 날엔 방긋 웃으며 몽정을 일으키고는 휑하니 사라졌다. 야누스였다. 미지의 세계에서 하루하루 미쳐가는 자신을 보고 또 한 번 미쳐갔다. 나른한 권태와 뒤틀린 절망이 오가면서 편집은 ‘는개’처럼 삶 속에 자연스럽게 내려앉기 시작한 것이다.


2. 독자(獨自)와 독자(讀者)

신문사 편집국은 활어(活魚)처럼 펄떡펄떡 뛰었다. ‘낯섦’과 ‘날 섬’ 사이에서 ‘+-’ 가 충돌했고 종일 팔딱거렸다. 굳이 누가 부르지 않아도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마땅히 뛰어야만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파시(波市)속의 생선장수 같았다. 특히 데스크들의 목소리가 컸다. 그들은 생선의 부위 부위를 알맞게 정돈하는 칼잡이 같았다. 잡아먹을 듯이 재촉했고, 잡아먹을 듯이 지적했다. 기자들의 귀싸대기를 갈기는 성질 급한 데스크를 보면서 망나니 같다고 뒷담화를 쳤다. 신문사의 군기가 군대보다도 더 강하다는 것을 이때 처음 알았다. 이는 ‘개인기’보다는 ‘하모니’를 중시하는 신문사의 특성 때문이었다.

일할 때는 전쟁터처럼, 일이 끝난 후에는 쉼터처럼 편집국은 암전과 커튼콜이 반복됐다. 조명이 꺼진 빈 무대는 무서우리만큼 정적에 휩싸였고, 편집기자는 객석에 홀로 남아 독자와의 만남에 두근거렸던 ‘샤프의 연극’을 떠올렸다. 오프라인과 데드라인을 거치며 치열하게 싸웠던 편집의 삶은 잉크냄새 폴폴 풍기던 신문 낱장이 위로했다. 두루마리용 활판윤전기 앞에 서서 만난 ‘가로 39.4㎝ 세로 54.5㎝. 가로7단 세로15단’의 신문은 싱싱했다. 집착, 외로움, 부대낌…. 이런 단어들이 주는 무게감을 느끼며 독자보다도 먼저 신문을 받아본다는 편집기자의 삶에 경외를 보냈다.


3. 쟁이와 장이

黑과 白, 텍스트를 집어 들고 제목과 레이아웃을 하는 것 못지않게 ‘쟁이’에 대한 사명감이 자신을 괴롭혔다. ‘취재는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를 보지만 편집은 숲을 봐야한다. 취재가 현미경을 들 때 편집은 망원경도 들어야한다. 취재가 사실을 말할 때 편집은 진실을 말해야한다.’는 선배의 고견을 가슴에서 떨칠 수가 없었다. 지병을 앓듯 지면은 외로웠고, 때로는 진짜 가슴을 심하게 앓았다.

요즘이야 CTS(컴퓨터조판)공정이지만 당시만 해도 첨단 따붙이기(paste-up)가 대세였다. 대지(臺紙)에 문자와 사진·그림 등을 붙이는 것인데 일본말로는 대지바리(臺紙貼り라고 했다. 따로따로 되어 있는 문자나 사진 등의 필름을 1페이지 단위로 평판인쇄판에 잘라 붙이는 것이다. 편집국과 광고국에서 원고가 넘어오면, 문자로 된 원고는 문선부에서 문선을 하고, 도형이나 삽화·사진 원고들은 제판부에 넘겨 동판으로 제작했다. 문선(文選)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손으로 각 글자에 대한 활자를 하나하나 골라서 갤리(galley)라는 상자에 식자하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라이노타이프(linotype)·모노타이프(monotype)·인터타이프(intertype) 등의 식자기로 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문선을 해서 소조(小組)가 짜이면, 그 다음 교정쇄를 뽑아 정판부로 넘긴다. 정판부에서는 문선부에서 들어온 소조들을 모두 종합, 지면구성의 얽기에 따라 각 면별로 대조판(大組版)하고 반원형의 연판을 만든다. 윤전부에서는 이 연판들을 윤전기에 걸어서 신문을 인쇄하게 되는 것이다. 구닥다리 얘기를 글로 옮기다보니 화자 또한 머리가 깨질 정도이니 그 작업이 어떠했으리라 짐작이 가리라. 물론 그 이전에는 납 활자를 사용해서 수공적(手工的)인 방법으로 문선·식자(植字)작업을 했다. 이때부터 ①납 활자를 사용해봤느냐 ②대지바리를 해봤느냐 ③처음부터 CTS로 시작했느냐를 두고 편집기자 신?구세대의 기준점으로 삼았다.


4. 편집의 부침(浮沈)

90년대 말 IMF(국제통화기금) 경제위기가 터지고 구조조정이 이어지면서 신문편집은 기나긴 험로를 걷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동료들이 잘려나갔고 월급이 끊겼다. 청빈(淸貧)하지 않으려했으나 청빈의 삶이었고, 부자가 되려고 무던히 애썼으나 가난했다. 적어도 탁발(托鉢)은 아니었으나, 월급이 끊겨 분유값 타령을 하게 만들었다. 삶은 갑자기 컬러에서 흑백으로 넘어갔고, 다시 컬러의 삶을 되찾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그런데 세상은 자꾸 인간의 남루한 본질에 대해 물어왔다. 이때는 말과 글을 경멸하며 말을 하고 글을 썼다. 말과 글을 경멸하면서 말과 글로 먹고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흔히들 얘기하는 ‘밥벌이의 지겨움’이 극심했던 때였다.

2000년, 다시 지면확장경쟁이 시작됐다. 촌(村)기자들이 무더기로 상경했고 낙향했던 2세대도 다시 상경했다. 어느 쪽을 택할지 고민하지 않았다. 돈 되는 곳, 돈 버는 곳으로 보따리를 싸서 떠났다. 편집인생에 ‘다소 흠이 있음’이라는 쪽지가 나붙어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 부침(浮沈)은 현실이었다. 귀살스러운 삶이었지만 태연한 척 했고, 애면글면 굴신도 했다. ‘오른쪽’이 반드시 ‘옳은 쪽’은 아니지 않은가. 문객과 식객 사이에서 허랑한 주객은 허구한 날 급전을 변통해서 술청을 찾았다. 술시(時)였다. 편집동네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7000일 동안 1만3000판을 짜면서 쟁이와 장이의 가엾은 숫자를 술잔 위에 떨구었다.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보다 사람으로 사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술이 필요할 만큼’ 외로울 때 술이 되고 말이 되고 동무가 되는 사람들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때때로 ‘술을 원수 삼아 원수 갚듯이’ 줄창 마셨다. 가장 지겹던 시절에 만난 가장 징그러운 나날들. 그것은 일사분란한 사회로부터 소박맞은 자의 처량한 몰골일 수도 있었다. 삶의 여유를 물외에서 누린 이는 안다. 지면에서 말소되기 전, 물정 모르는 꿈을 꾸고, 밤마다 눈물처럼 별들을 쏟아내던 그 시절의 아픈 이야기를 안다. 삼팔따라지의 몰골로 매일 만나는 편집증(paranoid)적인 편집은 ‘좋거나 싫거나’ 둘 중 하나였다.


5. 편집, 희로애락을 얘기하다

편집기자협회 40주년에 부쳐 조병철 시인(스포츠 조선 전무)은 협회보에 이렇게 시를 실었다.

비탄에 젖지 말아라

이제는 바람을 바람이라 부르는데

이제는 나무를 나무라고 부르는데

그대

하늘 보아라

나재필 기자여, 태풍이 지나 간 하늘을 보아라

편집은 하늘

하늘이 푸르지 않느냐.

시를 읽고 울었다. 파산정리부가 열쇠를 걸어 잠그고 폐쇄한 편집국 문 앞에서, 월급 150만원에 팔려나가는 처량한 신세 앞에서 울고 또 울었다.

“150만원 준다는데 일할래?”

“아뇨….”

“야, 거시기가 있는데 올래? 월급은….”

“압니다. 150만원 준다는 거….”

“야, 거시기가 있는데….”

“압니다. 월급은 150만원 주고 취재 겸 편집이라는 걸….”

“야, 거.시.기….”

“그만하세요. 다 압니다. 다 알지만 안갈 겁니다”

한때 그 사랑했던 편집을 완전히 떠날까도 생각했다. 비굴했고 아팠다. 뭔가 팔려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불쌍해지기 싫어서, 알량한 자존심이 남아서 몇 번을 포기하려다가 참았다. 가족의 힘이 컸다. 더더구나 오사바사하게 지낸 사람들이 건네준 웃음과 눈물 덕이 컸다. 그리고 죽을 만큼 힘들어도, 너무나 사랑한 ‘편집’을 놓기 싫은 아집 덕이 컸다. 그것이 결국 나의 위대한 유산이 됐다.

지금 난 그 지리멸렬했던 과거의 희로애락을 안고 다시 편집 펜을 들고 있다. 삶이란 어쩌면 시간과의 싸움이다. 인간은 그 겨룸에서 패배하기 마련이고 누구의 생애든 묘석의 생몰연대로 축약될 뿐이다. 오랜 기간 편집에 있으면서, 인생의 값어치를 따져본다. 노변의 잡초, 그 씨앗 한 알만큼의 값어치가 있었던가. 편집에 대한 생명의 불꽃이 정녕 있었던가를 끊임없이 자문한다. 더불어 9?11테러를 예견했던 미래학자 피터 슈워츠의 명언을 떠올린다. “편집만이 살아남는다. 이것이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