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나재필의 Feel <5회>


비가 내린다. 비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산발(散髮)한다. 얼마나 공평한 뿌림인가. 어느 특정인에게 내리는 것이 아니니 하늘의 익명성이다. 익명성은 불편함을 주지 않는 것이다. 감추니 까발려질 것도 없다. 그래서 비는 세상의 ‘우산’이다.

낙향(落鄕), 낙향을 외치며 괴나리봇짐을 싼지 벌써 6년이 흘렀다. 처음엔 낙향을 무슨 향락쯤으로 여겼다. 다소 불편하더라도 몸을 가벼이 할 수 있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다. 마치 모세가 인생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시나이 산으로 들어갔던 입산수도(入山修道)처럼 낙향은 하나의 ‘비움’이었다. 텃밭에 상추와 토마토, 푸성귀를 심고 아침이슬보다 더 일찍 일어나 풋것들을 따는 소소한 재미. 익명의 나비들이 가루받이해놓은 과실의 찬란한 꿀샘은 초록밥상에 부풀어 오르리. 행복이 눈물 나도록 겹쳐지는 정오엔 평상에 누워 꽃전의 향기를 맡으며 잠들겠지. 이 모든 것은 울력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니 잔잔한 행복이리라.

‘자족(自足)….’

스티브 잡스는 인생의 절정기에 병상에서 죽었고, 독재자 카다피는 반란군에게 질질 끌려 다니다가 죽었고, 박영석은 히말라야의 설산에서 죽었다. 어차피 한 줌의 인생이라면 인생의 절정기에서 채소 같은 삶을 살고 싶었던 것이다. 자족은 속된 일을 떠나 멋스럽게 노는 ‘유산풍류(遊山風流)’ 아니던가.

일찍이 내 몸엔 은둔과 유배의 피가 흐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광기 넘치던 청년시절, 6개월간 대문 밖을 나가지 않은 적이 있다. 깊은 산속도, 감옥도 아니었다. 문명이 활개 치는 도심 중간에서였다. 철저히 두문불출한 안거(安居), 일종의 칩거였는데 하루 종일 2평짜리 골방에 처박혀 글 나부랭이를 썼다. 글을 쓰고 밥을 먹고 마당 산보를 하고…. 다시 글을 쓰고 밥을 먹고 산보를 했다. 똑같은 일과에 싫증이 나면 산보를 다녀온 후 밥을 먹고 글을 썼다. 단순히 순서만 바꿨을 뿐인데 시간은 신선했다.

우리에 갇힌 짐승…. 갑갑증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대문 밖의 세상이 궁금했고 대문 밖의 수다가 그리웠다. 대문 밖의 음식이 그리웠고 대문 밖의 향락이 사무쳤다. 그러나 ‘세상의 문’을 열지 않았다. 내 마음에 자물쇠를 채워놓고 사육했다. 신기한 것은 소화 장애를 일으킬 것 같은데 오히려 식탐이 강해졌다. 닥치는 대로 먹었고 집히는 대로 입에 구겨 넣었다. 하루가 다르게 거울 앞의 모습이 수평지향으로 변했다. 1㎏, 2㎏…. 어떤 날은 하루에도 1㎏나 불었다.

그렇게 해서 원고지 2000매, 25만자의 글자를 난산(難産)했다. 하지만 탈고한 글들은 내 신세처럼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훗날 느낀 거지만 텍스트 자체가 조악했고 천박했다. 럭셔리의 반대말은 빈곤이 아니라 천박함이다. 6개월간 ‘사육되어진 책’ 2권은 결국 아무런 공과 없이 불쏘시개가 되고 말았다.

도통 예견했던 일들은 반대편으로 가려는 습성이 있다. 낙향지가 유배지가 되지 않기를 소원했지만 현실은 귀양 같았다. 야인(野人)이 되고자 했으나 점점 야만인이 되는 것 같았다. 눈물이 왜 짠지를 알게 되었다. 몸속에도 바다가 흐르고 있었다.

목하 맹활약 중인 ‘행복전도사들’은 이른바 ‘에덴주의’를 지향한다. 하지만 뜬구름 잡기나 사탕발림은 가짜 위로다.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파했던 행복전도사 최윤희 씨를 보라. 그녀는 지병이야 이겨냈지만 마음의 병만은 참을 수 없어 남편과 함께 동반 자살했다. 행복전도사마저도 행복하기 힘든 게 현실이다. 에덴주의자들은 ‘미친 무한경쟁을 중단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때 묻지 않은 ‘타잔’과 ‘제인’이 되라는 것이다.

하지만 낭만적인 허구다. 인정사정없는 지상의 삶은 포식자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분투해야만 한다. 자연의 출발점은 가난이었고 경쟁은 삶의 숙명이자 조건이기 때문이다. 에덴은 어디에도 없다. 어디에도 1등급의 행복은 없다. 따뜻한 위로는 차 한 잔이 아니라,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냉수 한 사발이다.

비가 그쳤다. 빗물은 눈물을 감춘다. 비가 그치면 눈물이 되살아난다. 빗물 때문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는 것이다. 어찌 세상살이에 화창한 날만 있을쏘냐. 궂은 날은 궂은 대로, 바람 부는 날엔 바람 속을 걸어가는 것이 그런대로 ‘타잔’의 방식이다.

낙향, 거꾸로 보면 향락. 향락을 위해 낙향했으나, 낙향에서 향락을 찾지는 못했다. 삶의 외피를 보듬는 순간 내피는 더욱 피폐해졌기에 그렇다. 삶은 컬러에서 흑백에서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두루뭉술한 색깔이 아니라, 버릴 것은 버리는 삶. 빛바랜 세월, 빛바랜 희망 끝에 컬러를 붙잡는 심정을 알랴. 비워야 채워지듯 흑백 톤이 되어가는 삶에서 낙향의 의미를 다시 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