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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칼럼 <9회>

중앙일보 김홍준 기자

즐거움을, 도움을 줬지만

슬금슬금 우리를 떠나는 것들

그러려니 하기엔 아쉬움은 크고…


집에도 오지(奧地)가 있다. 그곳에 내 등산 장비가 쌓여 있다. 지난 10년, 대부분 아내 몰래 구입한 것들이다. 뎅~ 맑은 공명음을 일으키며 떨어진, 이게 누구신가. 8자 하강기. 지난 4년, 주인과 함께 산에 가보지 못한 장비다. 8자 하강기는 생김새가 숫자 8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 1970년대에 세상에 나왔다. 내가 암벽의 길에 들어섰을 때 주위에서 권해줬다. 지금 이 장비는 주인의 외면을 받고 있다. 이유가 있다. 경사가 급한 곳에서 제동력이 약하다. 게다가 무겁다. ‘돼지코’(튜브형)의 등장도 한몫했다. 돼지코는 8자 하강기보다 작고, 가볍고, 안전하다.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줬지만 8자 하강기는 섭섭하고 허망하게도 멸종의 길로 향하고 있다. 슬금슬금 우리 곁을 떠나는 것들. 알고 보면 참 많다.


# 카세트 테이프

어둠의 한 구석. 잘 쓰지도 않는 더블 데크 카세트 플레이어. 그것을 감싼 장 안에 손을 뻗어 물건들을 쓸어내왔다. 툭, 툭, 투툭…. 카세트테이프 20여 개가 떨어졌다. 데이비드 보위의 1983년 작 ‘Let’s dance’, 마돈나의 84년 작 ‘Like a virgin’ …. 5년 전, 아이들의 정서 함양과 지식 구축을 위해 사준 플레이어는 아이들 책상 위에서 그 바닥으로 자리를 옮겼다. 마루에서 1년 쯤 굴러다니다더니 지금은 재활용 용품을 모으는 곳으로 바짝 다가섰다. 요새 나오는 차에는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가 없다. 음반매장에서도 카세트테이프 앨범 코너가 자취를 감췄다. 휴대용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의 양대 산맥, 마이마이나 워크맨을 차고 다니면 우쭐해지던 시절. 플레이어의 건전지를 아끼기 위해 모나미 153 볼펜을 카세트테이프 톱니에 걸고 빙빙 돌리던 때. 다 한때가 되고 말았다.


# 리어카

97년. 대학 학과 동기이자, 서클 동기인 친구가 졸업을 앞두고 나에게 배달의 기수가 돼 달라고 부탁했다. 학교 근처 철물점에서거금 3만원을 주고 리어카를 빌렸다. 그리고 이삿짐을 날라줬다. 답례는 진짜 배달의 기수가 날라준 탕수육과 자장면이었다. 전륜 구동도 아니고 ABS도 없지만 마른 길 진 길 마다않는 탄탄한 두 바퀴. 맷집 좋은 자동차 볼보도 놀랄만한 망사형의 철 구조물. 뱃심으로 끌고 팔심으로 밀 수 있는 인체공학 헤드(손잡이). 리어카에 계란 한가득 싣고 낭랑한 목소리로 ‘계란이요’를 외치던 그 아주머니는 어디 계실까. 고~오물, 삽니다! 골목길에서 목소리 쩌렁쩌렁 올린 그 고물상 아저씨는…. 아, 나는 봤다. 리어카 헤드에 매달려 언덕길을 쏜살같이 내려오는 환경미화원 아저씨를. 균형을 잡기 위해 허공에서 자전거 페달 돌리듯 다리를 구르는 그 분의 곡예를.


# 10원

4730원. 약값이다. 약사가 말한다. 4700원이라고. 약사는 말없이 미소만 날린다. 나도 미소로 답한다. 이렇게 쌍방 합의하에, 에누리가 형성 됐다. 10원 단위는 어느새 장부상에만 등장하는 신세가 됐다. 10원짜리로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공중전화 한 통화가 70원. 대부분이 100원짜리를 넣고 30원은 버리고 온다. 국민은 그래도 불만이 없다. 10원짜리 받는 게 영 불편해서일까. 아버지가 내건 우승 상금 30원을 놓고 형들과 닭싸움을 벌였다. 피 터지게 싸웠다. 30원이면, 다음날 달콤한 알사탕 한 움큼 살 수 있었던 때였다.


#그 외

우체통은 어디 있을까. 최근 10년 간 땅 파고 삼각형 긋고 구슬치기 하는 애들 못 봤다. 친구들 패대기치는 놀이인 오징어도 있었지. 공중전화는 대체 어디 박혀 있지? 개비 담배는 어디서 팔까. 아줌마, 소주 반병만 되요?


#내 8자

지난 토요일, 춘천 의암댐 앞의 드름산 춘클리지라는 암벽 코스에 갔다. 난이도 5.11b. 설악산 비선대 앞의 적벽처럼 생겼다 하여 코스 이름이 ‘적벽의 꿈’이다. 몇 동작을 취하지 않아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팔 근육은 부하를 견디지 못해 터질 듯했다. 바위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있다. 추락의 공포에 두 다리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것이다. 신음을 토하며 혼자 중얼거렸다. 괜히 왔어. 다시는 안 온다. 팔다리가 바위에 긁혀 피를 보고서야 등반이 끝났다. 떨리는 손으로 간만에 주인과 함께 온 8자 하강기를 꺼냈다. 그런데 아차! 8자 하강기가 손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뎅, 데~엥, 데~에~엥…. 바위에 부딪히며 마지막 신음을 내뱉고 있는 8자 하강기. 아이고, 내 팔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