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나재필의 Feel <4회>


지천에 꽃이 활짝 피었다. 만개한 꽃은 엽록소를 잔뜩 품은 여인의 향기처럼 짙고 매혹적이다. 꽃들을 보노라니 수없이 낙화(落花)하던 지난밤 꿈이 물정 모르고 되살아난다. 꿈속의 꽃은 별처럼 쏟아지며 찰나의 만개를 하고 있었다.

휴일 아침, 식통구(食通口) 같은 냉장고 안을 보니 꾀죄죄하다. 아내를 겁 없이 부르는 자신을 발견하고 짐짓 놀란다. 하루 한 끼 볼가심만 하면 먹었지만 중년(?)이 되니 되레 반찬투정이 심해진다. 충성맹세의 상징처럼 ‘아내’라는 크라바트(Cravate)를 앞가슴에 매고, 주면 주는 대로 받아먹었던 신혼시절 단꿈이 바스라진다. 아내와 살면 살수록 오사바사하게 지냈던 시절이 자꾸 닳는다. 주객으로 살다가, 문객으로 살다가, 이제 식객으로 사는데 뭐 그리 마뜩찮은지 모를 일이다.

문주란이 귀 따갑게 노래한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가 사내의 건방을 나무란다. ‘처음에 사랑할 땐 씩씩했던 남자가 점점 애기가 되어가고, 밤하늘의 별과 달을 따주마 약속한 그가 이젠 밥 달라 사랑 달라 보채기만 하니 진짜 밉상’ 아닌가.

비록 가난한 땟국마저도 함께 나누며 불평불만 없던 남편과 아내. 막역함과 막연함 사이에서 갈등한다. 누군가는 말했다. 중년은 ‘굳은살’ 같다고. 영화 속 ‘으악새 배우’(으악하고 비명 한번 지른 뒤 죽어나가는 단역배우)처럼 살면서 사회의 무수한 펀치를 맞았으니 단단한 굳은살이 생긴 게 당연하다. 이 굳은살은 쪼잔한 가부장적 권위와 뒤치다꺼리에 지친 아내 사이에서 절규한다.

나이가 먹을수록 남자는 당최 숙맥처럼 옴나위를 못하게 되고 여자는 그런 남자가 귀찮아진다. 그럴 만도 하다. 매일 거실에서 빈둥거리는 ‘거실남’, 아내에게 걸려온 전화를 귀 쫑긋 세우고 엿듣는 ‘파자마맨’, 어딜 가나 졸졸 따라다니는 ‘중년 펫(pet)’, 하루 세끼 밥 차려줘야 하는 ‘삼식(三食)이’…. 그야말로 ‘종간나 새끼’(하루 세 끼에 종일 간식까지 요구해 아내를 귀찮게 한다는 뜻)다.

중년의 여자에게 필요한 다섯 가지는 무엇인가? 정답은 ①돈 ②건강 ③딸 ④친구 ⑤강아지다. 그렇다면 중년의 남자에게 필요한 다섯 가지는 무엇일까? ①아내 ②와이프 ③처 ④마누라 ⑤안사람이다. 우스갯소리이지만 글자 하나하나에 남자의 눈물이 찍혀있다. 늙어가는 남자가 부담스러운 것은 싫다, 밉다가 아니라 ‘불편하다’는 의미다. 눈 뜨면 회사에 나갔다가 자정이 돼서야 돌아오던 남편이 나이 들면서는 아내에게 점점 더 의지하는 꼴이니 대략 난감한 것이다.

그렇다고 남자여 기죽지 마라.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비럭질 수준의 권태로운 노동에 몸 바친 그 열정은 욕먹을 일이 아니다. 데데한 소시민적인 경제관념을 가지고 식솔을 챙기느라 하루하루 전투를 치르고 있음을 인정한다. 비록 나잇살이 갑옷처럼 걸쳐져있지만 찬밥취급 받을 만큼 나잇값을 못하는 것은 아닐진대. 혀 빠지게 일만 했으니 당연히 혼자서 놀 줄도 모르고, 집안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모르는 것 아닌가. 설거지를 시작하라. 빨래를 돌려라. 청소기를 잡아라. 가끔은 찌개도 끓여라. 귀둥이로 자랐어도 그 부풀어진 꿈은 호주머니 속에 잠시 넣어두라. 외롭고 신산스러운 삶의 늪에서, 그렇게라도 몸피를 불리는 것이 너도 살고 나도 사는 방법이다.

(아!~)

아내의 주름살이 마치 밭고랑처럼 보인다. 아직은 실처럼 가늘고 여리지만 그 고랑에 핀 세월의 흔적이 지난하다. 바람이 골을 따라 휑하니 지나간다. 그 바람은 억척스럽다. 모든 걸 품어주고 감싸줄 만큼 넓고 아늑하다. 고랑을 자세히 보니 바람이 지나간 자리가 아니라 눈물자국처럼 보인다. 그 고랑은 전적으로 남편의 유죄다. 유죄의 증거다. 술을 원수 삼아, 원수 갚듯이 줄창 마셔댔던 ‘늙마’의 허세를 반성한다. 가난에 대해 핑계 대고 부귀영화를 장담하던 혈기를 반성한다.

이제 중년의 남자로 살기 위해 훈련을 시작한다. 하루에 한번 고맙다, 사랑한다, 미안하다는 말을 한다. 시답지 않은 얘기라도 마주앉아 수다를 떤다. 오버액션이지만 드라마를 보면서도 맞장구를 친다. 아내가 웃으니 나도 웃는다. 아내의 목젖이 보이니 내 치아도 웃는다.

소년 등과(登科?출세), 중년 상처, 노년 궁핍이라 했던가. 날을 더할수록 주는 것은 살날이요 느는 것은 산 날이다. 남들처럼 똑같은 짝퉁 인생을 살아간다 해도 중년을 좀 더 멋지게 살아야지. 덤으로 사는 잉여인간은 되지 말아야지 스스로 새끼손가락을 걸어본다. 소년 같은 중년, ‘종간나 새끼’의 부질없는 봄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