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나재필의 Feel <3회>


피로한 사회다.


성공신화의 신기루에 목숨을 건 사람들, 성과사회에 내몰린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기착취를 대수롭지 않게 한다. 결국 자신이 가해자이고 피해자다. 죽을 때까지 일하다 쓰러지다보니 노예에 진배없다. 살벌한 소진(burnout)이다.

타인착취를 업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영리하다. “너는 할 수 있어”라고 슬쩍 격려한 뒤 “놀지 말고 열심히 일해”라고 부추긴다. 착취는 주인을 죽이면 자유를 얻지만, 자기착취는 내가 주인이자 노예이니 죽을 때까지 일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현대인은 억울하고 우울하다. ‘열심히 일한 당신, 쉬어라’ ‘열심히 놀았던 당신 일해라’의 양비론을 자세히 살피면 모두가 ‘일해라’다.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윌리는 30년 넘게 외판원으로 일해 중산층이 된다. 그는 대공황의 급류에 휩쓸려 해고된 뒤 방황하다가 차를 과속으로 몰아서 자살한다. 가족에겐 생명보험금이 돌아간다. 아내는 절규한다. “빚을 갚았지만 이 집에서 같이 살 사람이 없어졌는데 무슨 소용이냐”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 년에 평균 2111시간 일한다. OECD 평균보다 500시간이나 많다. 2006년 이후 5년 사이 1574명이 과로로 죽었다. 남자 과로사는 임원과 관리직이 25%로 가장 많았다. 고위직일수록 회사생활 수명은 길지만 정작 삶의 수명은 짧다는 것이다. 이들 대부분의 공통점은 잘나가지만 일중독, 일벌레들이다. 일단 글자에 ‘중독’과 ‘벌레’가 붙으니 비정상적이란 얘기가 된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직장인들 사이에 ‘샐러던트(saladent)’라는 신조어가 나돌았다. 직장에 나가 월급(salary)을 받는 틈틈이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학생(student)처럼 공부하는 샐러리맨을 의미한다. 실직과 이직에 대비해 구명보트를 미리 예약하는 것이다. 살기 위해 ‘죽자 살자’ 뛰는 것이니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아니다. 단지 비정한 승부세계를 보는 이만 즐겁고 뛰는 이는 고통스럽다. 장시간 근로는 삶의 질은 물론 장기적으로 생산성까지 떨어뜨린다. 일당백의 자세로, 1인3역으로 일해도 봉급은 1인분이다. 주5일제가 되었다고 좋아들 하지만 여행과 취미활동은 호사이고 괜한 방구들만 닳는 게 현실이다.

직장은 변종인간의 양성소다. 아첨과 협잡, 경쟁에 함몰되다보니 분노와 갈등을 유발한다. 동독 국가평의회의장이었던 에리히 호네커는 스스로를 실력 있는 사냥꾼으로 여겼다. 사냥을 할 때마다 사슴·멧돼지·노루가 그의 총구로 우르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놀라운 사냥 이면에는 작은 비밀이 숨어있었다. 사냥터가 있는 곳이 바로 야외동물원이었기에 부하들은 호네커가 출동하면 토끼 한 마리도 빠져나갈 수 없도록 철통같이 막아놓고, 먹잇감을 그의 총구 쪽으로 몰아댔다.

예전에는 배고픔, 절대적 빈곤의 ‘헝그리(hungry) 시대’였지만 지금은 배 아픔, 상대적 빈곤을 느끼는 ‘앵그리(angry) 시대’다. 배고픈 것을 이겨내기 위해 아파도 일했으나, 이제 빈부의 양극화로 인해 배가 아프다. 사주는 배부르고 사원은 배고프니 화가 나는 것이다. 10년간 1300개 직업이 생길 동안 그 경제성장의 과실은 누가 다 먹었을까.

이력서에 ‘직장’이라 쓰고 마음으론 ‘정신병원’이라고 읽는다던가. 경쟁과 성장에 함몰돼 ‘개인’이란 이름은 소멸돼가고 있다. 그 자리에 ‘사익’이라는 사명이 붙었다. 임금은 동결하고 목표는 상향하니, 정작 뛰려는 사람은 없고 튀려는 사람들 천지다. 그렇다고 ‘정신병원’을 탈출할 처지도 아니다. 단호하게 떠나거나, 미련 없이 내려놓아야 하는데 그런 용자(勇者)는 많지 않다. 인간은 자신이 평균 이상이라고 생각하며 결과도 평균 이상일 것이라 확신한다. 그러니 ‘실패한 부류’에 그 누가 속하고 싶겠는가.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아니라, 결리니까 중년이다. 아플 수도 없는 중년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진짜 재미있는 인생을 살고 싶어진다. 느슨해지는 괄약근만큼이나 세상살이에 대한 조임이 약해져도 마음만은 팔팔하기 때문이다.

한가득 밀려오는 퇴출에 대한 불안, 비어있는 을(乙)의 통장, 하루에도 수십 번 잔고를 뒤져 귀신처럼 돈을 빼가는 ‘갑(甲)’의 매정함, 없는 자에게 더 철저한 납세의 의무, 학교보다 학원에서 공부를 더하는 死(사)교육, 조폭보다 더 싸움을 잘하는 정치판….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화날 일들만 있다. ‘헝그리(hungry)’는 참을만한데 ‘앵그리(angry)’는 부피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힘내자, 아직 살날들이 많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