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나재필의 Feel <2회>


‘나 이제 떠날 거야.’


지겨운 밥벌이를 반복하는 삶에는 자유가 깃들지 않는다. 하루하루가 전쟁인 장삼이사들은 항상 날고 싶어 한다. 인생은, 즐기고 누리고 향유할 만큼 길지 않다. 짧은 인생을 좀 더 멋지게 사는 길은 ‘삶을 느리게 껴안고 가는 것’이다. 빠른 속도로 목적지에 도달해본들 그 끝점에는 꿈이 뼈대처럼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박모(薄暮)의 꿈은 또 다른 꿈을 꾸지 못할 만큼 생명이 연약하다.

자전거여행은 이런 인간의 느린 DNA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살아있는 아날로그다. 인간의 두 다리가 끌고 가는 걷기의 변형인 셈이다. 자동차에 비해 느리고 효율도 떨어지지만 이보다 더 인간적인 교통수단은 없다. 두 발로 걸어야할 인간이 그나마 네 바퀴가 아닌, 두 바퀴로 가고자하는 것은 착한 반칙이다. 그것은 뭐든지 속박하려는 세상의 속도감을 거부한다. 디지털치매에 걸린 인간이 자전거를 타는 것은 휴대전화를 끄고 침묵의 거울에 자아의 민얼굴을 비춰보는 것과 같다.

지난해 이맘때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 대는’ 옥천 향수 100리길을 자전거로 달린 적이 있다. 정지용 생가에서 정지용 생가로 되돌아오는 50.6㎞의 코스였는데 대전에서부터 자전거를 탔으니 향수 100리가 아니라 애수(哀愁) 300리(120㎞)였다. 무려 10시간이 넘는 대장정이었다. 2년 전엔 대전서 서울까지 자전거여행을 시도했는데 평택에서 중도 포기하고 말았다. 유성-세종시-천안-성환-송탄까지 8시간을 달리다 ‘낭심 부상’을 입고 주저앉고 말았던 것이다. 주인을 잃은 자전거는 정기화물편에 쓸쓸히 주소지로 보내졌다.

사실 자전거여행은 편히 가면 ‘여행’이요, 몇 시간이 넘으면 ‘고행’이 된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계속 페달을 밟아야하는 것이 순리이니 목하, 지고라도 가야한다. 폭양은 여행자의 등을 떠밀고 사타구니 핏줄은 선지가 되어 응고된다. 엉덩이에 쿠션 패드 달린 스판덱스 쫄바지라도 입으면 다행이련만 전문 라이더가 아니라면 별수 없다. 요행은 없다. 자전거 길은 정직하다. 오르막이 나오면 반드시 내리막이 나온다. 갈 때는 오르막이지만 올 때는 내리막이다. 모든 오르막과 내리막은 길에서 5대5로 비긴다. 산비탈을 헉헉대며 오르는 날숨의 절망은 잠시 후 얻게 될 희망이다. 그러니 자전거 타기는 삶의 공평함을 확인하는 길이다.

자전거의 미덕은 ‘인간의 속도’라는 점이다. 주마간산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느리지만 언제든 자연으로, 세상으로, 사람들 속으로 뛰어들 수 있다. 물론 몸을 직접 움직여야하는 수고로움이 있어야한다. 내 몸이 주인이자 하인인 것이다. 내 몸을 손님처럼 잘 모셔야 바퀴는 쉼 없이 굴러간다. 내 몸을 하대하면 바퀴는 내 몸을 냉대한다.

모리스 르블랑 소설 ‘이것이 날개다’의 두 여주인공은 블라우스를 벗어젖히고 젖가슴을 드러낸 채 자전거를 탄다. 파인더 속 그녀들의 ‘자탄풍’은 무한한 해방감이다. 오직 그것뿐이다. ‘쟈니 김’(김영석)이라는 사람은 20년간 자전거 무전여행을 했다. 스물아홉 살에 떠난 여행은 쉰 살을 바라보는 나이에야 반환점을 돌았다. 결국 가장 긴 세월동안 집에 안 가고 세계여행을 한 괴력과 집념의 사나이다. 이들의 흥성함이 부럽다.

바야흐로 강줄기를 따라 만들어지고 있는 1297㎞의 자전거 길, 10년 내 남한 외곽을 口자 형태로 연결할 3114㎞짜리 전국 일주도로는 로망이다. ‘은륜(銀輪)의 페달’로 동네 한바퀴, 산 너머 한바퀴, 그리고 다른 동네 한 바퀴 정도로 영역을 넓히다보면 한반도 순례 길은 완성된다. 여포의 천리마 같은 자동차를 버리고, 생활의 반려로 자리 잡은 자전거에 올라타 보라. 자동차를 타고 갈 때 보지 못한 세상의 풍경, 왁자지껄하게 피어있는 지상의 꽃들을 가장 먼저 보리라.

봄이 8시를 가리킨다. 8시의 봄은 새벽이 이슬을 먹고 기지개를 켜는 미동(微動)의 시간이다. 농익은 ‘봄’은 멀리 있지 않다. 두 페달은 기꺼이 가장 느린 속도로, 가장 빠르게 세상의 피안(彼岸)으로 안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