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술병을 열면 맑고 달콤한 향이 코끝으로 스며든다. 도토리 깍지만한 잔에 담아 입안으로 털어 넣으면 불덩이를 삼킨 듯 뱃속까지 뜨겁게 달아오른다. 뜨거움은 잠시, 거짓말처럼 고요가 찾아온다. 묵직하고 간결하다. 한잔 술에 시말(始末)이 다른 인생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 중년의 입맛을 길들이는 맛이다. 6000년 넘는 동안 5000여 종의 술이 등장한 중국의 역사에서 바이주(白酒)를 최고로 인정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빼갈·고량주·이과두주·공부가주…. 한국에서 바이주는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주종과 브랜드를 마구 혼용해 부른다. 정식 명칭은 바이주다. 고량(수수)과 쌀·찹쌀·밀 등의 곡류와 엿기름을 섞어 술지게미와 함께 쪄 땅속에서 발효시킨 뒤 증류해 얻는다. 여러 곡물을 배합해 다양한 맛을 내는 것이 문화의 용광로인 중국을 빼닮았다. ‘화(華)’의 정수라고 할만하다.


◆ 술잔에 담긴 중국

"술이 식기 전에 돌아오겠소” 삼국지에서 화웅을 베기 전, 출전을 앞둔 관운장(關羽)의 말이다. “고기가 많아도 밥보다 많이 드시지 않았고, 오로지 술은 정해진 양이 없었다” 이것은 공자(孔子)를 두고 한 말이다. ‘시경’, ‘논어’, ‘사기’, ‘삼국지’ 등의 수많은 저술과 역사서에 술에 대한 이야기가 거론된다. 술에 대한 중국인들의 자존심은 둘째가라면 서럽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누룩을 사용해 술을 빚었는데 이는 동양 술의 전형이 됐다. 또한 술의 기능을 병을 치료하고 노인을 공양하며 예절을 갖추는 3가지로 보았다. 따라서 술을 귀하고 소중하게 다루었고 제조 도구나 주전자, 술잔 등 음주 도구들도 발전했다.

중국 술은 주로 곡주인데 북방에서는 주로 수수와 조를, 남방에서는 쌀을 이용했다. 원나라 때 증류 기술이 전파되기 전에는 우리의 청주와 유사한 황주(黃酒)가 주종을 이루었다. 원대부터는 소주 소비량이 늘어나 청대에 이르면 북방에서는 바이주 소비량이 주를 이루었고 양자강 이남에서는 황주를 마셨다.

황주는 옅은 갈색으로 중국 최초의 왕조인 은나라 시대부터 제조됐다. 삼국지에 나오는 영웅들이나 당·송대의 시인 묵객에 이르기까지 중국 호걸들은 이 술의 맛과 멋에 취했던 것이다. 황주 중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술로서 소흥주(紹興酒)가 있다. 찹쌀을 보리누룩으로 발효시켜 감호의 물을 이용해 담그는데 알코올 도수는 15~20도이며 오래 묵은 것일수록 좋다.


◆ 향에 취한 바이주

바이주는 갖가지 재료를 섞은 술로 90일 이상 땅속에서 발효시켜 증류해 원액을 뽑아낸다. 그 뒤에는 항아리에서 숙성시켜 무색투명한 술이 나온다. 오크통에서 숙성해 나무의 색깔과 목질부의 분해 산물로 맛과 색깔이 영향 받는 위스키와는 다르다. 중국에서 가장 좋은 바이주가 나오는 곳은 후한 시대 유비가 촉한(蜀漢)의 수도로 세운 청두다. 습도가 높고 흐린 날이 많아 효모가 번식하기 좋은 환경이라서다.

바이주는 숙성과 배합, 술의 재료 등에 따라 청향형(淸香型), 농향형(濃香型), 장향형(醬香型), 미향형(米香型), 기타형(其他型) 등으로 종류를 구분한다.


청향형은 바이주의 기본이 되는 술로 모든 향형의 기초가 되기도 한다. 보통 아세톤·페놀·콩·짚·누룩 등의 향을 풍긴다. 맛은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청아하며 곡물감·감칠맛이 은은히 퍼진다. 청향이라는 이름처럼 맑으며 클래식함을 품고 있다. 가장 많은 한국인들이 보편적으로 선호하는 술로 꼽힌다. 중국집에서 흔히 보이는 고량주(高梁酒), 이과두주(二鍋頭酒)가 여기 속한다. 대표 술로는 15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분주(汾酒) 등이 있다.



분주에 대한 찬양은 오래 전부터 이어져왔다. 명나라 말기 농민봉기를 일으킨 이자성(李自成)은 싱화춘에서 분주를 맛본 뒤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하다(盡善盡美)”고 입이 닳도록 칭찬했다고 한다. 청나라 소설가 이여진(李汝珍)은 <경화연(鏡花緣)>이라는 작품에서 전국 유명 술 50여종 가운데 분주가 제일이라고 칭송한 바도 있다.

농향형은 언뜻 파인애플향에 가깝게 느껴진다. 배·세멘다인향이 화사하게 코끝을 찌르기 때문이다. 향이 짙으며, 향기가 입안에서 감돌아 술맛이 달고 부드러우며 끝맛이 오래가는 것이 특징이다. 화사한 향과 분명한 단맛, 그리고 농후함까지 갖춘 술로 바이주 입문자들에게는 좋은 선택지일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심심찮게 찾는 연태고량주(烟台古釀酒) , 공부가주(孔府家酒)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대표 술로는 노주노교 이곡(二曲), 오량액(五粮液), 쑹허량예(宋河糧液) 등이 있다. 

쑹허량예는 허난성에서 유일하게 ‘중국명주’ 타이틀을 획득한 농향형 바이주로 기원전 571년 노자가 바이주를 마시고 별안간 깨달음을 얻어 도교를 창시했다는 설이 있는데, 당시 노자가 마신 것이 오늘날의 쑹허(宋河) 물을 사용한 술이었다고 한다.

장향형은 ‘된장이나 간장류의 콩 발효식품에서 나는 향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약간 옅은 황색을 띠고 누룩의 향이 진하게 배어 강렬하게 느껴진다. 개성 있는 쿰쿰한 향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다. 단맛·쓴맛이 어우러지며 부드럽고 목 넘김이 상쾌하다. 끝맛의 여운은 길다. 마신 후 빈잔이 차 있을 때 향보다 더 그윽해 사람을 아주 즐겁게 만드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대표 술로는 세계 3대 명주로 뽑히는 마오타이(茅台酒), 사천성(四川省)의 낭주 등이 있다. 낭주는 마오타이와 그 맥을 같이하는 바이주다. 적수하(赤水河)가 빚는 또 하나의 명주이기 때문이다. 적수하 중류 즈음에 유독 맑고 차며 물맛이 단 계류(溪流)가 있는데 이를 ‘낭천’이라 불렸고 여기서 이름이 유래됐다. 천연 동굴에 술을 저장하는 유일한 바이주로 ‘산의 샘물이 술을 만들고 깊은 동굴이 그것을 익힌다’는 말도 여기서 비롯된다.

미향형은 쌀을 주원료로 하는데 쌀누룩을 당화발효제로 쓴다. 맑고 투명한 색으로 다른 향형보다 진하지 않는 단아한 향을 풍기며 깨끗하다.주객들을 순수함에 젖게 만든다. 계림삼화주(桂林三花酒)는 미향형의 대표로 ‘미주의 왕(米酒之王)’이라는 별칭이 있다. 삭힌 두부, 구이린 고추장과 함께 구이린(계림)의 세 가지 보물(桂林三寶)에 속할 정도로 광시 지역의 명물로 꼽힌다.

기타형은 위의 향형에 들어가지 않는 모든 경유에 해당한다. 약향형(藥香型), 겸향형(兼香型), 봉향형(鳳香型), 특향형(特香型)…수많은 향형들이 있으며 이중 겸향형에는 특별한 점이 있다. 주로 2가지 이상의 향이 나는 바이주를 일컫는데, 일반적으로 농향형과 장향형 술의 특징을 동시에 보인다. 대표적인 겸향형 바이주에는 동주(董酒), 백운변(白雲邊) 등이 있다. 백운변은 마오타이주의 장향, 노주노교의 농향, 분주의 청향이 하나로 합쳐져 깨끗하면서도 깊은 맛이 난다. 서기 957년 주선(酒仙) 이백(李白)이 현재의 후베이성 쑹쯔(松滋)시 근처 호수에서 야경을 감상하다 술을 마시고 즉흥시를 지은 데서 ‘백운변’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아직 한국에선 제한적인 종류의 바이주만 유통되고 있다. 국내 유통점보다는 면세점에 바이주의 종류가 더 다양하며 보틀숍 ‘와인앤모어’나 대림동의 ‘천리마대박마트’에 가서야 그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다. 깨어나는 꽃향기의 계절, ‘향기의 예술’ 바이주에 취해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