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기계적 반복은 편집의 적... 자기만의 언어·스타일 갖춰라


  편집은 뉴스를 읽는 게임이기도 하지만, 읽은 뉴스를 독자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해 아이디어를 내는 게임이기도 하다. 석간 두 신문은 독일총리가 아우슈비츠 수용소 현장을 찾아가 묵념 을 하는 사진의 가치를 찾아냈고 그 의미를 똑같이 읽어냈다. 식민지 과거 사과에 인색한 일본에게 이 사진을 좀 보고 반성하라는 게 메시지다. 그런데 한 신문은 그걸 우리 말로 표현했고, 한 신문은 아예 일본 총리도 읽을 수 있도록 일본어로 제목을 달았다. 한번 더 머리를 쓴 것이다. 이날 의문의 1패를 당하고 생각이 1인치 짧았던 편집을 크게 반성했던 기억이 있다.


편집기자 실력은 읽는 힘에서 나온다


쓰는 힘과 읽는 힘은 소통의 양대 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문사 편집국에는 쓰는 힘과 읽는 힘이 공존해야 합니다. 취재기자는 현상을 읽고 사건을 읽고 취재원의 워딩(wording)을 읽어내야 합니다. 그가 쓰는 기사는 그 읽은 결과를 표현한 것이죠. 읽는 힘은 기자의 중요한 역량입니다. 읽는 힘은 관점과 지식과 정리능력과 창의적인 해석과 비전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관점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직관력, 통찰력, 자기성찰, 문제의 핵심 읽기, 트렌드와 주변요소 읽기, 배려와 사려, 취재원의 심리적 정황 분석, 집요한 사실 확인의 미덕이 바탕에 깔려있어야 합니다. 제대로 읽어야 제대로 쓸 수 있다는 심플한 진리를 많은 기자들이 까먹고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읽어내지 못한 것을 소화되지 않은 채 쏟아낸 기사는 읽기가 괴로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의미있는 소통을 만들지 못합니다. 

편집기자 또한 읽는 힘과 쓰는 힘을 갖춰야 합니다. 편집기자들은 헤드라인을 다는 일에 큰 비중을 두게 마련이라, 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길지 모릅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릅니다. 편집기자야 말로 읽는 힘이 훨씬 중요합니다. 기사를 빠르게 힘있게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면, 좋은 헤드라인이 나올 리가 없습니다. 기사 속에는 이미 취재기자가 '사실이나 정보'를 읽어낸 결과가 담겨있습니다. 취재기자가 무엇을 읽었느냐를 파악하는 것이 핵심적인 읽기입니다. 

 하지만 취재기자가 읽은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 또한 편집기자가 해야할 '읽기'의 어려움이죠. 취재기자는 현장을 읽었을 뿐이지만, 편집기자는 그것이 신문이라는 '세상을 담는 그릇'에 어떻게 의미화되고 구성되고 전시되어야 하는지를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때로는 크게 읽고 때로는 세밀하게 읽고 때로는 부정적으로 읽고 때로는 긍정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개별 뉴스로 읽어내야 할 때도 있고 트렌드나 패션, 혹은 사건 흐름으로 읽어야할 때도 있습니다.

후배의 역량을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은, 기사를 읽는 힘입니다. 기사 속에 들어있는 뉴스를 파악할 줄 알아야 하고, 왜 취재기자가 이 기사를 썼는지, 취재원은 왜 이 이야기를 전달하려 하는지, 그것이 오늘 여기에서 무슨 의미인지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게 안되면, 무엇으로 헤드라인을 달겠습니까. 스스로 마음 속에 정리된 뉴스가 아닌데, 어떻게 제목이 정리될 수 있겠습니까. 정확하고 창의적으로 읽어내야, 제목이 번득이며 아름다우며 감동적일 수 있습니다. 

레이아웃 또한 뉴스를 읽어낸 뒤에 그것이 제대로 표현되어야 힘이 생기고 생동감이 돋워집니다. 읽는 힘은 그냥 생기는 게 아니라, 수많은 시행착오와 경우의 수들을 체험한 뒤에야 생겨나는 내공이며 미립이죠. 여기엔 독서력도 중요하며 지식도 필요하며 판단력과 센스와 도덕적 관점, 철학 또한 갖춰져야 합니다. 읽지 못하면 쓰지 못합니다. 잘 읽는 것은 잘 쓰는 것의 절반 이상을 이룬 것과 같습니다. 

한달에 책을 한 권도 안 읽는 기자는, 불행한 기자입니다. 1년에 시집을 한 권도 안 읽는 기자는, 답답한 기자입니다. 기사 속에서만 헤드라인을 찾아내려고 끙끙거리고 있는 기자는 한심한 편집기자입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표현된 언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간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죠. '행간'을 읽는다는 것은 세상과 문제와 의미와 인생과 나를 읽는 것과 같습니다. 그게 보이지 않는다면, 이 물에서는 가엾은 편집문맹일 수 밖에 없습니다.

편집 놀이


연일 술자리로 몸이 지치고, 일도 바쁜 와중이지만, 겸손하고 정이 많은 타사후배 Y가 오랜 만에 하는 청을 거절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늦게라도 가겠다고 했습니다. 미안하지만 아직 업무중인 후배들을 두고, 약속 장소를 향해 나섰습니다. 광화문의 라이브 카페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는 그 카페골목을 돌다가 찾은 2층의 조그만 술집. Y를 포함해 기자6명이 앉아 있었지요.

전날 강의 때 본 얼굴들이라 반갑게 인사를 했습니다. 마침 스피커 바로 앞자리에 앉은데다 소리가 쾅쾅 울려서 대화는 거의 불가능했죠. 그런 가운데 귓속말로 얘기하고 또 만년필을 꺼내 냅킨에 적어서 대화를 하기도 했습니다.

술집에는 작은 무대가 있었는데 가수 2명이 번 갈아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누군가가 저 두 가수의 제목을 한번 달아보자고 제안했습니다. 두 번째 가수를 보면서 Y는 시골의 어머니가 생각난다고 했습니다. 수건을 쓰고 일을 하던 모습이 연상된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그녀는 ‘수건맘’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수건맘은 여러 가지 버전으로 발전을 했습니다. 수건이기 보다는 이태리타올처럼 보인다는 의견에 따라, 타올맘이 나왔고, 찜질방 패션이라는 점에서 찜질맘도 등장했습니다. 심지어 ‘이태리맘’까지도 나왔죠.

첫 번째 남가수는 뭐라고 달까? 특징적이긴 한데, 뭐라고 한 마디로 딱 꼬집어 말하기가 어려운 경우였습니다. 결국 낙착된 제목은 ‘마식남’이었습니다. 마이크를 먹는 남자. 좌중은 폭소하며 동의를 표시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수건맘에 대한 이견이 등장했죠. 트랜스젠더일 가능성이 제기된 것입니다. 잠깐 논란이 있었죠. 수건사피엔스로 일단 가닥을 잡았습니다. 제목쟁이들은 이렇게 놉니다. 내내 낄낄거리며 즐거워했죠. 


편집이 잘 늘지 않는 기자의 비밀 


 처음에 만났을 땐 죽죽 자랄 것 같던 기자가, 10년이 지나도 그대로인 경우가 있습니다. 재기발랄, 열정진정, 분노흥분, 신중엄중, 순발역발을 다 갖췄는데, 왜 편집이 늘지 않는 것일까요. 이것에 대해 나름으로 분석한 결과 일정한 비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첫째, 편집이 큰 것인줄로만 알았지 아주 작은 것인 줄 모르는 경우입니다. 편집은 꽉 짜여진 여건 속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는 것 같은 기사를 붙들고 씨름하는 것이죠. 그래서 1밀리미터의 차이가 천당과 지옥의 차이입니다. 이걸 이해 못하는 게 깊은 병통입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의 머리카락을 1밀리미터 들어올리는 힘이 바로 편집입니다. 창의와 파격은 무모해보이는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둘째, 편집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올라가는 계단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입니다. 절대로 기계적인 편집이 쌓여 생물적인 편집이 되지 않습니다.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것은 편집이 아닙니다. 뉴스를 읽고 그 의미를 부여하는 자기 방식의 편집언어를 개발해야 합니다. 레이아웃, 제목, 컬러, 그래픽, 사진, 그리고 뉴스의 음미력. 이게 모두 편집언어를 위한 툴입니다. 편집기자는 여러 개의 붓을 들고 하나의 완성체를 만들어가는 화가입니다. 늘 다른 문제, 늘 다른 상황, 늘 다른 감각, 늘 다른 포인트에 갈증을 느껴야 깊이가 생깁니다.


셋째, 편집이 개성이라고, 치밀하고 섬세한 집중 없이 재크 콩나무처럼 엄청나게 자기 식대로 벋어가는 경우입니다. 편집이 개성인 것은 맞지만 그것은 문법을 갖췄을 때부터 시작하는 것이죠. 기초가 되어있지 않는 개성은 자신의 불행이고 신문의 불행일 수 있습니다. 기초를 갖추는 것은, 신문을, 자기잣대를 버리고 읽는 사람의 수준으로 겸허하게 읽는 일 밖에 없습니다. 신문은 너무 똑똑한 사람이 만드는 것이 고질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독자가 그만큼의 똑똑함을 따라가려고 하지 않기에, 신문이 이 모양으로 주저앉은 것인지 모릅니다.


넷째, 튀는 것이 편집이라고 생각하면 그때부터 망가지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튀는 것은 편집이 아니라 전략입니다. 전략없이 튀는 것은, 프로가 아닙니다. 신문의 선정성은 고도의 사회적인 문법을 따른 결론입니다. 안 튀는 것도 문제이지만 튀는 것이 더 문제인 경우도 많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튀는 것도 실력인데, 아무렇게나 튀어놓고 스스로 감동하는 것은 독자에 대한 큰 결례일 수 있습니다.


다섯째, 편집기자가 기본적으로 국어기자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사람도 문제입니다. 말을 하면서 수시로 비문을 생산하고 수시로 오자를 내고 수시로 어설픈 논리를 들이대는 이는 결국 편집의 재앙만 키울 수 밖에 없습니다. 꾹꾹 눌러다져 스스로의 국어를 키우고 어휘를 키우고 지성을 키우고 향기를 키우는 것 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국어가 되지 않는 사람이 제대로 편집기자가 된 경우를 본 적이 없습니다.


여섯째, 편집은 뉴스를 읽는 힘입니다. 뉴스에 접근했다고 기사가 아니라 뉴스를 해석해내고 그것을 표현해내고 독자와 공감할 수 있는 여지를 키워야 합니다. 사진 하나에 감동할 수 있지만 사진 하나에만 의존하는 편집은 어쩐지 공허합니다. 편집의 본령은 언어에 있기 때문입니다. 뉴스를 어떻게 가장 착 달라붙는 언어로 표현하느냐, 그게 편집의 혀입니다. 뉴스 속에 들어있는 복잡하고 다양한 냄새를 어떻게 분간해내서 하나의 후각으로 정리하느냐, 그게 편집의 코입니다. 뉴스는 길거리에 채이는 바로 그 일상과, 간판처럼 만나는 그 보편의 문제들입니다. 익숙하고 확고하고 기사가 될 것 같지 않은 그 뉴스 앞에서 편집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걸 깨닫지 못하면 편집도루묵입니다.


일곱째, 편집의 핵심은 나를 편집하는 힘입니다. 자기를 바꾸는 힘이며, 그 바꾼 자기로 신문과 조직을 바꾸는 힘입니다. 자기의 미완성을 인정하고 겸허하게 다시 판갈이하는 저력입니다. 공명으로 편집하는 것, 혹은 나이로 편집하는 것, 혹은 왕년의 내 자랑으로 편집하는 것은 신문을 전시대적인 공해산업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지금 여기 막 원고지 20매를 받은 마감 5분전의 핏발 선 눈으로 편집할 수 있어야, 필사즉생의 길이 트입니다. 내가 아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편집을 하면서 밥 벌어먹고 사는 것은 편집이 아닙니다. 편집기자가 위대해지면, 한 편집기자가 신문이 될 수 있고 언론이 될 수 있으며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주인공이 바로 이글을 읽는 후배입니다. 

아주경제 편집총괄 겸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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