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술술 읽히는 이야기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그곳은 설국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는 소설 ‘설국(雪國)’에서 니가타(新潟)를 눈의 나라로 그린다. 인구 250만명의 작은 현이지만, 일본 북방 문화를 대표하는 지역이다. 그중 하나가 ‘사케’다. 일본 최고의 명수로 꼽히는 스가나다케(菅名岳) 설산의 눈 녹은 물과 고시히카리(벼 품종)로 담은 사케는 명품으로 꼽힌다.
올해는 코로나19 대유행으로 모임도 셧다운 됐지만 예년 같으면 송년회 신년회가 한창일 추운 계절이 돌아왔다. 최근 직장인들이 저도주를 선호하기 때문에 폭탄주 대신 따뜻한 사케를 많이들 선택한다. 사케는 몸을 부드럽게 해 주는 술이다. 한겨울 따뜻하게 중탕한 사케를 홀짝이면 알코올이 조금씩 온몸에 퍼져 양볼이 빨개진다. 여기에 달달한 쌀향이 마음까지 녹인다. 석탄처럼 순간적으로 화력을 내는 러시아 보드카나 중국 바이주와는 다르다. 봄철 벚꽃놀이에 잘 어울리기도 하는 이유다. ‘고독한 미식가’ ‘심야식당’에 등장하는 출연자들의 표정만 살펴봐도 사케의 본질을 금세 알 수 있다.
술이 흥분의 메타포라면, 사케는 무거운 감정을 달래주고 심리·정서의 안정을 되찾아주는 치료제라고 할 수 있다. 한국도 번화가부터 집 앞 골목 구석구석까지 일본식 선술집이 들어서며 사케로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는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 사케의 저변도 넓어지고 있다. 1미터는 족히 돼 보이는 큰 병부터 우유팩·알루미늄캔 등 다양한 포장의 사케를 볼 수 있다.
최고급 사케는 데워서 먹지 않는다고 한다. 향과 알코올이 날아가서 고유의 풍미를 즐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귀한 술을 시켜놓고도 그 맛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런 우를 범하지 않으려면 공부가 필요하다.



서울 남산 자락에 있는 후암동의 이자카야.



사케를 읽다
일본 후쿠오카에서는 해마다 소문난 술 축제가 열린다. 일본 최대의 술 축제를 일본 사람들은 ‘사케마쓰리’라 부른다. 이 축제에서는 ‘호화 준마이 다이긴조 천년수’ ‘준마이 다이긴조 반슈’ ‘50준마이 긴조 겐슈’ 등 전국의 유명 청주를 맛볼 수 있다.
그런데 ‘다이긴조·긴조·준마이’는 무슨 뜻일까.
사케를 빚는 쌀은 밥을 지어 먹는 쌀과 다르다. 밥쌀보다 1.5배쯤 큰 양조용 쌀이다. 이 쌀을 그대로 다 쓰지도 않는다. 겉부분을 깎아버리고 술을 빚는다. 겉부분이 술의 맛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쌀을 깎아낸 정도에 따라 사케의 등급이 바뀐다. 다이긴조(大吟釀)는 쌀을 50% 이상 깎아내 만든 사케의 최고 등급이다. 긴조(吟釀)는 다이긴조보다 한 단계 아래로 쌀을 40% 이상 깎아내고 만든 술이다. 도쿠베츠 준마이(純米)나 횬죠조(本釀造)는 30% 이상 깎아내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섬세함은 떨어지지만 맛 자체가 강해 입에 와 닿는 느낌이 힘차서 마니아들도 많다. 순수하게 쌀만 쓴 것은 준마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저급 사케는 양조용 알코올을 섞고 단맛 등을 첨가하기도 한다.
사케의 알코올 도수는 15~19도이다. 쌀의 전분과 아미노산이 분해되며 만들어진 은은한 단맛과 감칠맛이 난다. 사케의 맛을 크게 아마구치(甘口)와 가라구치(辛口)로 표현하는데 아마구치는 단맛이 특징이다. 가라구치는 와인의 ‘드라이한 맛’과 흡사하다. 병에 붙은 라벨에 맛(주도·酒度)에 대한 수치(-5~+10)가 있는데 바로 이들을 의미한다. 제로(0)를 기준으로 플러스는 가라구치의 세기를 마이너스는 아마구치의 강도를 나타낸다.
사케는 맥주와 유사하게 생주와 저장주로 나뉜다. 나마자케(생주)는 발효후 미세한 필터에 걸러 병입한 술이다. 풍미가 있고 신선하며 부드러운 맛을 갖고 있다. 나마조조슈(생저장주)는 발효 후 병에 담기 전 저온 살균을 한 술로서 유통 기간이 길다. 은은한 과일 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나나조조슈의 특징이다. 고슈(고주)는 청주를 빚어 오크통에 장기간 숙성시켜서 만든 술이다. 일반 사케에서는 느낄 수 없는 무겁고 중후한 맛과 향이 특징이다. 보통 3~10년은 숙성해야 고주라고 부른다.
사케에도 명주가 있다. 그런 술은 부르는 게 값이다. 720㎖ 한 병에 수십만원, 수백만원을 호가하기도 한다. 왕실에 진상한다는 니시키노마노즈루나 고시노간바이 등이 대표적이다. 사케 브랜드에는 등급별 수천 가지가 있으며 오토코야마·니혼사카리·구보타 만쥬·핫카이산 등이 많이 알려져 있다. 일부에선 지역·음식점·료칸마다 직접 제조한 사케도 있다.


사케를 먹다
일본인들의 술 문화는 첨잔, 미즈와리(증류주에 물을 혼합하여 알코올 도수를 7~8도로 낮추는 것) 등으로 한국 문화와 다르다. 일본주를 마시는 방법도 매우 독특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케를 뜨겁게 또는 차갑게 마시는 방법을 선호하지만 일본에서는 35~45도 정도로 데워 마신다. 사람의 체온과 유사한 온도가 맛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데우는 방법도 불에 직접 끓이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물에 잔채 집어넣어 중탕으로 데운다. 불에 직접 끓이면 향이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생주는 신선하게 유통되어 차게 마신다.
사케와 함께 즐길 음식을 고를 때는 얼마나 매운지, 뜨거운지, 차가운지, 사시미와 같이 원료 자체의 맛을 살린 것인지 등의 여부를 고려한다. 회와 같이 조리하지 않고 식재료 본연의 맛을 전하는 섬세한 음식에는 준마이 다이긴조나 준마이 긴조와 같이 깨끗하고 드라이한 맛의 사케가 좋다. 튀김이나 조림, 데리야키 등 열을 가한 음식에는 긴조나 혼죠조, 겐슈 들이 어울린다. 즉 양념을 하지 않거나 약하게 한 음식에는 깔끔한 순미주가 좋고 양념을 많이 하거나 튀긴 음식에는 주정을 혼합한 가미 사케가 딱이다.
사케와 어울리는 음식점엔 ‘이자카야 문화’를 처음 주도한 김건 셰프의 ‘이치에’가 있다. 일본식 숙성회의 깊은 맛이 깃들어 있는 ‘사시미 모리야와세’가 일품이다. 남산자락 후암동엔 맛좋게 사케를 즐길 수 있는 곳이 제법 많다. 가성비 좋은 숙성회·벤또가 있는 ‘이창희 스시’와 삿포로식 징기스칸 양고기 구이집인 ‘야스노야’ 등이 유명하다. 힐튼호텔 뒤편엔 일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이름없는 이자카야도 인상적이다. 사케의 본고장 일본에선 료칸 가이세키와 직접 제조하는 사케를 맛보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다. 도쿄 ‘히카리 스시’ 등 솜씨가 뛰어난 동네 스시집에서 현지인들과 함께 사케를 즐기는 것 또한 제맛이다.
서울경제 김은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