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사연이 있는 문장


중국 송나라 때 궁중 화가를 뽑는 시험이 열렸다. 주제는 ‘말과 꽃’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내로라하는 화가들은 저마다의 솜씨를 뽐내며 그림을 그렸다. 꽃밭에서 뛰노는 말, 갈기에 꽃을 꽂고 있는 말, 꽃을 입에 물고 있는 말 등등. 하나같이 화폭을 찢고 나올 듯이 생동감이 넘쳐 흘렀다. 그런데 정작 장원을 차지한 그림에는 꽃이 등장하지 않았다. 초원을 달리는 말 뒷발굽에 따라다니는 나비를 한 마리 그렸을 뿐이었다.
나는 한때 국내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광고대행사의 외주 카피라이터로 일한 적이 있다. 학교 선생을 때려치우고 학원가를 전전하다가 호구지책으로 얻은 일자리였다.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맞추느라 국내외의 수많은 카피를 분석하면서 깨달은 점이 있다. 훌륭한 카피는 하나같이 메시지를 노골적으로 전달하지 않았다. 메시지로 인해 발생할 ‘결과’를 말해줄 뿐이었다. 마치 말발굽에 물든 꽃물을 따라다니는 나비를 그리듯이.
유행가 가사의 90%는 ‘사랑해’라는 말을 ‘사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 만약 한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너는 그냥 가만히 있어. 다 내가 해줄게.”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남진의 ‘둥지’) 만약 헤어진 그녀를 잊지 못한다면? “걷다보니 신천역 4번 출구 앞이야~”라고 울부짖지 않을까. (포맨의 ‘안녕 나야’) 요컨대 ‘사랑하면 어떤 말과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될까’를 보여주여야 세련된 가사라고 할 수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해 보고싶어 미치겠어’만 반복하는 ‘요즘 것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용인에 집 사고 남은 돈으로 아내 차 뽑아줬다’ 유명한 카피라이터 정철의 아파트 광고 카피이다. 아파트 가격이 얼마나 싼 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그 아파트를 사서 남은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2학기에는 널 보는 친구들의 시선이 달라질거야’ 일본의 보습학원 카피이다. 이 학원을 다니면 성적이 오른다고 말하지 않는다. 성적이 오르면 발생할 결과를 말해줄 뿐이다.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고은 시인의 ‘그 꽃’도 마찬가지다. ‘내려갈 때 보았네 / 올라갈 때 못 본 / 그 꽃’ 젊어서 산을 올라가듯 악다구니쓰며 살아간다. 뒤처지면 죽는다는 생각에 주변에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 피어있어도 알아채지 못한다. 그러나 젊음이 꺾이고 인생이 내리막길로 들어서야 비로소 주변이 눈에 들어온다. 그때야 지금껏 몰랐던 ‘그 꽃’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늙음’을 ‘늙음’이 아닌 결과로 표현한 탁월한 시이다.
‘그가 웃었다, 세상이 환해진다’ <내 마음의 풍금>이라는 영화의 홍보 카피이다. 순박한 열일곱살 산골처녀가 학교에 부임한 총각 선생님과 짝사랑에 빠진다. 보통 남녀가 사랑에 빠지면 노골적으로 ‘그(녀)에게 반했다’ 또는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위 카피는 사랑하는 사람이 웃으면 세상이 환해진다는 결과를 말한다. 그렇다. 사랑에 빠지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아이와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아버지가 되면, 사진은 훌륭해진다’ 카메라 브랜드 캐논의 카피이다. 아버지가 되면 왜 사진이 훌륭해질까? 아기가 없을 때는 대충 막 찍었어도 이제는 아기의 성장을 기록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아기가 생기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그러다 보니 사진 한 장도 대충 찍을 수가 없다. 아기가 없을 때의 사진과 아기가 생겼을 때의 사진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 이것이 카피라이터의 감각이다.
“알게 되면 참으로 아끼게 되고, 아끼면 참으로 볼 수 있게 되며, 안목이 트이면 이를 수집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저 쌓아두는 것과는 다르다(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 而非徒畜也)” 조선 정조 때의 문인이었던 유한준(1732~1811) 선생의 제목 없는 시이다. 꽃을 그려서 꽃을 표현하는 화가는 많다. 나비를 그려서 꽃을 표현할 수 있어야 훌륭한 화가이다. 글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나의 문장은 예뻐보이고자 하는 욕심에 현란한 꽃들만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것은 아닐까?


백건필 (주)백건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