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술술 읽히는 이야기 


꽃향기와 과실향기를 안고 있으며, 봄의 따스함을 전해주고 여름의 더위와 갈증을 씻어주며, 가을의 싱그러움과 풍요로움을 만끽하게 하고 겨울의 첫눈처럼 기다림을 주는 술, 그것이 우리의 전통주이다. ‘우리 술’의 첫 경험은 술을 밥 먹듯이 마시던 대학 새내기 시절. 고즈넉한 분위기에 옛 음악이 흐르는 전통 술집에서 였다. 일반 탁주와 달리 투명한 빛을 띠며 달고 깔끔한 목 넘김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날은 ‘우리 술’의 향에 처음으로 취한 날이었다.



 전통주갤러리 강남점 전경.전통주갤러리 강남점 홈페이지



계절마다 달랐던 ‘우리 술의 향’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는 계절 변화에 따라 세시풍속이 형성되었다. 이에 계절에 맞는 재료를 이용하거나 자연 변화에 따른 술빚기가 발달했다.
한 해가 시작되는 설날을 시작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마셨던 계절주는 ‘세주’부터 시작된다. 차례를 모시기 위한 술인 만큼 선조들은 정성을 다해 술을 빚었다. ‘세주’는 차례상을 물리고 나서 온 가족이 한 잔씩 술을 나눠 마셨다. 정월의 또 다른 절기주로는 ‘귀밝이술(이명주)’이 있다. 대보름날 가족 모두가 한 잔씩 마시면 1년 내내 귓병이 없고 귀가 밝아진다고 한다. 강남에 간 제비가 돌아온다는 삼짇날이 되면 진달래를 따다 화전도 빚고 두견주를 빚었다. 청명, 한식일에는 찹쌀로 빚은 청명주로 조상의 묘를 찾았다. 봄의 기운이 가장 왕성한 단오날에는 잘 익은 ‘부의주’에 창포 뿌리를 넣어 숙성시킨 ‘창포주’로 하루를 즐겼다.
더워지기 시작하는 6월 6일은 유두일로 이날 마시는 절기주는 ‘농주’다. 전국적으로 빚어 마시는 ‘동동주’와 ‘막걸리’가 대부분으로 단오날 마시고 남은 창포주를 걸러 만든 막걸리를 즐기기도 했다.
무더위가 한풀 꺾여 서늘해질 무렵이면 가장 큰 명절인 한가위가 돌아온다. 한가위에는 차례상에 올릴 술이며 떡을 빚는데 햅쌀로 빚은 술을 ‘신도주’ 또는 ‘햅쌀술’이라고 한다. 또 가을이 깊어지는 9월 중앙절에는 야생 황국을 넣어 만든 국화주를 즐겼다.
겨울에는 매화주를 즐겼다. 엄동설한의 고난을 이기고 만개한 매화는 향기가 매혹적이다. 잘 빚어 빛깔이 밝고 맑은 술에 매화가 동동 떠 있는 매화주는 선비의 마음을 사로잡은 최고의 술이었다.
이렇듯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절기주들은 특별한 목적으로 빚은 술 아니면 대개가 가향주 성격이 강하다.


잃어버린 ‘우리 술의 향’
반만년 역사 동안 찬란하게 발전해온 우리 술. 우리나라 술은 크게 나누어 탁주, 약주, 소주의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금주정책으로 술에 대한 과세나 전매 제도가 없었다. 따라서 집에서 술을 빚어 마시는 가양주 문화가 번성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로 넘어오면서 조선주세령이 발표되었다. 이에 양조면허를 받은 양조장을 제외한 술을 빚는 것이 금지되고 주세를 부과했다. 이 때문에 우리 민족의 감칠맛을 돋워줬던 ‘우리만의 누룩’은 사라지고 말았다. 또한 왜식청주(정종), 맥주, 양주 등 외래주가 대거 유입되었다.
1945년 광복을 맞았지만 우리 술은 더욱 피폐해졌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곤궁, 청산되지 못한 일본식 제도의 잔재의 여파 때문이다. 탁주가 양적 팽창을 했고 희석식 소주가 시장을 점령했다. 질적 성장보단 외형만 커진 셈이다. 그로 인해 우리의 진정한 전통술은 거의 명맥이 끊어져 버렸다. 다행히 1980년대 이후부터 불합리한 규제와 제약이 조금씩 해소되어 전통술 50여종이 재현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업장이 영세하고 전문 양조기술과 영업력 부재로 찬란했던 전통 가양주 문화가 복원되기에는 힘든 실정이다. 그나마 1995년부터 술을 개인이 빚어 마시는 것이 허용된 점이 위안이 된다.


명맥을 이어온 전통술
이강주, 한산소곡주, 안동소주, 오메기술…. 아직 우리 주변에 많은 전통주들이 지역별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경기도를 대표하는 술로는 ‘군포당정옥로주’와 ‘남한산성소주’다. ‘군포당정옥로주’는 찹쌀과 율무로 빚은 경기도 지방의 전통술로 술을 빚을 때 증기가 액화되는 과정에서 옥구슬 같은 이슬방울이 떨어진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 ‘군포당정옥로주’는 유씨 가문에서 1880년경부터 만들어 먹던 가양주라고 한다. 역사가 무려 400년이 넘는다고 알려진 ‘남한산성소주’는 알코올 도수가 40도에 달하지만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다. 선조 때 전쟁에 대비해 남한산성을 축조하면서 이때부터 빚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옥선주’는 강원도 지역에서 만들어진 전통주로 옥수수와 쌀로 발효하여 칡으로 숙성시킨 술이다. 알코올 농도 40%의 증류식 순곡주로 술 특유의 쓴 맛은 없고 그윽한 곡향이 입안 가득 감돌면서 시원하고 화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충청도를 대표하는 ‘한산소곡주’는 삼국시대 백제의 궁중 술로 1,500여 년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술을 빚던 며느리가 확인 차 젓가락으로 찍어 먹었는데 그 맛이 좋아 계속 먹다 취해 일어나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다 하여 ‘앉은뱅이 술’이라고도 불린다. 찹쌀과 누룩을 주원료로 들국화, 메주콩, 생강, 홍고추 등을 넣고 100일간 숙성을 하여 빚는다.
경상도에는 널리 알려진 ‘안동소주’가 있다. ‘안동소주’는 접객용뿐 아니라 상처, 배앓이, 식욕부진, 소화불량 등에 좋아 약용으로 쓰였다. 고유의 곡향과 깔끔한 뒷맛이 외국 사람의 입맛에도 좋아 널리 사랑받는다.
조선 3대 명주로 유명한 ‘이강주’는 전라도를 대표한다. 전주의 ‘이강주’는 6대를 이어온 전통 가양주로 토종 소주에 배, 생강, 강황, 계피를 넣고 꿀을 가미해 만드는 전통주다. 조선 중기부터 전라도와 황해도에서 제조되었고 오래 묵힐수록 맛과 향이 좋아진다.
논이 흔하지 않은 제주도에서는 쌀이 귀했기 때문에 차조를 이용해서 술을 만들었다. 가장 대표적인 제주 지역의 전통주는 시도무형문화재 제주도 제3호로 지정된 ‘오메기술’이다. 차조로 만드는 오메기 떡에서 유래하였다. 일명 강술이라고도 불린다. 이 외에도 문배술, 죽력고 등 다양한 전통술들이 우리 곁에 남아있다.
현재 전국의 양조장들은 대개 전통술 갤러리나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 그 곳에서 다양한 시음 및 체험행사를 진행한다. 이번 주말 가족과 함께 전통술을 빚어보고 ‘우리 술’의 향과 맛에 취해보면 어떨까.


서울경제 김은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