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사연이 있는 문장


내 인생의 스승은 고스톱이었다. 나에게 처음 고스톱을 가르쳐 준 사람은 아버지였다. 경기도에서 조그만 화초가게를 운영하시던 아버지는 손님이 없을 때면 군용모포를 깔고 나를 부르시곤 했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나는 일종의 인간 한게임인 셈이었다. 어머니는 못 마땅해하셨지만 나는 좋았다. 고스톱은 아버지가 어머니 몰래 나에게 용돈을 주시던 자금세탁방식이기도 했다. 매일 술만 드시지 않았다면 꽤 괜찮은 아버지였을 것이다.
고스톱은 불공평했다. 무작위로 패를 돌리는 순간, 황금패를 쥔 자와 똥패를 쥔 자가 나뉜다. 광을 한 두 개라도 들은 판은 마음이 든든하지만, 껍데기만 한 가득 받으면 드는 생각은 딱 하나다. '이번 판은 여기까진가보다' 아예 날 생각은 포기하고, 어떻게든 부지런히 피를 모은다. 청단이 깔려 있어도 피를 택하고, 광이 깔려있어도 피를 먹는다. 나려고 하는 게 아니다. 어차피 못 날 거 피박이나 면하려고 하는 것이다.
좋은 패를 든 사람은 한 방에 나려고 큰 것만 노린다. 그러나 꼭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광으로 나려는 사람은 광 2개 모으고 끝이다. 3개를 모아도 꼭 그 중에 하나는 비광이다. 고도리로 나려는 사람도 꼭 새 한 마리가 부족해서 하늘을 날지 못한다. 띠로 나려는 사람도 2개까지 모으기는 쉽지만 꼭 3번째는 다른 사람에게 돌아간다. 잘난 패를 든 사람들이 서로 뺏고 빼앗으며 싸우는 동안 서서히 껍데기의 반란이 시작된다.
한 장씩, 한 장씩, 9장의 피를 모을 때까지는 0점이다. 그러다가 10장을 모으는 순간 피는 광보다 귀해진다. 티핑포인트를 넘은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한 장 올라갈 때마다 1점씩이다. 11장이면 2점, 12장이면 3점. 났다. 어느새 3점이 되고 나면 고를 부를지 스톱을 부를지 결정할 수 있는 주도권을 가진다. 아는가? 고스톱 게임은 난 순간부터가 시작이다. 그전까지는 준비게임이었을 뿐이다.
8년의 교직 생활을 그만두고 1인 기업가로 독립했을 때 내 손에 든 패 중에 쓸 만한 패는 하나도 없었다. 사업자금으로 쓰겠다고 연금 대신 받은 퇴직금 4천만 원은 어어 하는 사이 녹아 없어졌다. 이곳저곳 글품을 팔아서 원고료라도 들어오면 연체 금액이 빠지기 전에 재빨리 인출해서 교통카드부터 충전해야 했다. 아, 이번 판은 여기까진가보다. 인생이란 아사리판에서 물러나서 그냥 광이나 팔고 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때부터였다. 부지런히 피를 모은 것이. 일체의 외부 강연을 중단하고 방구석에 처박혀서 동영상 강의를 찍었다. 일주일 내내 폐인처럼 산 끝에 온라인코스 제작에 관한 100개짜리 한 강을 완성했다. 돈이 되지 않았다. 또 찍었다. 200개 완성. 팔리지 않았다. 또 찍었다. 300개, 400개. 어느덧 10개 과목 총 1000개의 강의가 완성됐다. 온라인코스 사이트도 만들었다. 때마침 코로나가 터졌다.
오프라인 강의시장이 무너지면서 줌을 활용한 온라인강의 시장이 활성화되었다. 이런 사태를 예상한 것은 아니었지만 미리 만들어 둔 1000개의 강의는 큰 힘이 되었다. 날고 기는 강사는 많지만 1000개의 온라인강의를 찍은 강사는 없었다. 그때부터 한 강이 올라갈 때마다 돈이 벌렸다. 묶음 강의는 묶음 강의대로 팔고, 새로 추가되는 강의는 새로 추가되는 강의대로 팔았다. 온라인강의 플랫폼비즈니스로 '주식회사 백건필'이라는 법인도 하나 세웠다. 이제 준비게임이 끝났다. 이제부터 본게임 시작이다. GO!
아버지는 내가 교사가 된 것도, 교직을 때려치운 것도, 빌빌거리며 피를 모으던 것도, 법인을 세운 것도 모르신다. 삶보다 술이 좋아 그 전에 인생을 스톱하셨다. 가끔 전통시장을 돌다가 깔깔한 군용모포라도 보면 그때가 떠오른다. 한동안 찾아뵙지 않던 수목장 산소에 찾아가야겠다. 비석에 낙엽도 쓸어드리고 소주 한 잔 올리고, 못 피우는 담배도 한 대 붙여 올려야겠다.백건필 (주)백건필 대표
※카피라이터이자 싱어송라이터인 백건필 대표가 사연이 있는 문장을 소개하는 새 연재를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