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광주일보 유제관 부국장 나의 5·18 편집기

 

올해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계엄군의 총탄에 아버지를 잃은 1980년 5월 18일 생 김소영씨가 불혹의 나이가 되었고, ‘오월 꼬마 상주’ 조천호씨는 반백을 앞두고 있습니다. 비애와 슬픔은 80년 5월 광주를 지나온 이들에게 운명입니다.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었지만 5.18항쟁은 여전히 진행형이고, 광주시민들은 ‘국민의 군대가 국민에 총을 쏜 그 날의 기억’을 떨쳐내지 못합니다. 왜곡과 망언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5.18의 가장 큰 과제는 여전히 ‘진실 규명’과 ‘오월정신의 전국화’입니다.


 

5월 그 날이 다시 오면
그 해 5월 광주에 있었습니다. 금남로에서의 아찔했던 기억도 많습니다. 10여년 뒤 광주일보에 입사했을 땐 사무실이 전일빌딩 내에 있었습니다. 5·18 당시 광주에는 전남일보와 전남매일 2개의 신문사가 있었는데, 전두환의 신군부에 의해 강제 통폐합되었고 제3의 이름 ‘광주일보’가 되었습니다. 전일빌딩은 10층 규모의 건물로 6층까지는 일반 사무실이고, 7층 편집국, 8층과 9층 강당과 사무실, 10층은 신문 등 각종 자료를 보관하는 자료실이었습니다. 즉 7, 8, 9, 10층은 5·18 이후 구조 변경 없이 80년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헬기사격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광주일보는 지난 2000년에 ‘5·18 20주년 희생자 339명, 오월 광주 붉디붉은 꽃 넋 민주화의 횃불로 타오르다’라는 제목으로 4개면 특집을 제작했습니다. <지면 ①>. 희생자의 얼굴을 모두 지면에 넣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편집이었습니다. 이 지면을 통해 본격적으로 5·18 관련 편집을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5·18 희생자와 부상자의 규모는 얼마나 될까요? 계엄사의 발표와 언론 보도를 믿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80년 6월 2일자 광주일보(옛 전남매일) 1면에 실린 김준태 시인의 시는 제목의 3분의 2가 잘려나갔고, 시는 대부분이 삭제됐습니다. 계엄군이 편집국에 상주해 빨간 사인펜으로 ‘삭’이라는 표시로 기사 하나하나를 검열했습니다. 현대사에 조예가 깊은 미국의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한국현대사’라는 책에서 증언과 자료를 바탕으로 500여 명이 사망했고 약 960여 명이 실종되었다고 썼습니다. 2006년 광주시 피해자 보상 기준으로 사망자는 166명입니다. 신고된 행불자는 448명인데 정부가 공식 인정한 숫자는 78명뿐입니다. 행불자 가족이 스스로 5·18 관련성을 입증해야 인정되기 때문입니다. 국립 5·18민주묘지엔 현재 832기가 안장되어 있습니다.


잔혹한 학살은 대물림된다
광주일보는 2017년 5월 15일자에 5·18 당시 도청 앞 집단발포에 참여한 11공수부대 지대장 윤성식(가명) 대위 인터뷰 기사를 실었습니다. <지면 ②>. “나도 쐈다 총알 떨어질 때까지. 조준사격에 시민 수 십 명 쓰러져”라는 제목으로 편집했습니다. 그러나 제작과정에서 많은 의견이 표출되었습니다. 도청 앞 집단발포 관련 계엄군의 증언은 여러 번 있었고, 인터뷰 내용 중에 “부대원들 중에 월남전 참전 용사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는 짧지만 충격적인 증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잔혹한 5·18 진압군 속 월남전 참전용사 있었다’는 제목으로 편집하려 했지만 지면에 반영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윤성식 대위의 증언을 통해 30년 넘게 가져왔던 궁금증을 풀 수 있었습니다. 5·18은 베트남전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학살의 대물림’입니다. 베트남전은 1975년에 끝났고, 그 때 참전했던 일부 사병들이 장기 하사관으로 공수부대에 들어갔으며, 5·18 때 광주에 진압군으로 투입됐다. 그리고 그들의 잔혹함은 중대장이나 지대장들이 제어할 수 없을 정도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생각했던 제목을 편집에 반영하지 못한 아쉬움은 이후 외신에서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전두환과 최세창(당시 3공수 여단장) 등 정치군인들이 5월 광주를 베트남의 한 도시에서의 전투처럼 생각하고 시민들을 학살했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 더욱 컸습니다. 모든 기사의 성격은 제목에 의해 좌우되고 역사적 사실도 편집을 통해 독자들에게 인식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됐습니다.


‘주남마을 학살사건’을 아시나요?
5·18 진상규명이 어려운 이유는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이 당시의 모든 기록을 위조 변조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1980년 ‘80위원회’와 1987년 ‘5·11 대책반’을 통해 대대적인 5·18 지우기에 나섰습니다. 80위원회는 5·18 직후에, 5·11 대책반은 국회 광주청문회를 앞두고 가동됐습니다. 이들은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안기부, 보안사, 국방부, 검찰, 경찰을 망라한 조직으로 5·18 관련 군과 경찰 그리고 행정부의 모든 문서를 위조, 변조해 5·18을 왜곡시켰습니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군 문서나 경찰 문서는 당시 작성한 기록이 아니라 원본부터 모두 새롭게 작성한 ‘오염’된 자료입니다. 1980년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발포를 한 11공수여단의 상황일지에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의 내용이 단 한 줄도 없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주남마을 학살사건’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1980년 5월 23일 도로가에 매복하고 있던 11공수부대가 화순으로 가는 미니버스를 집중 사격해, 버스에 타고 있던 시민 18명 중 15명이 현장에서 숨졌습니다. 나머지 3명 중 2명 또한 계엄군에 의해 피살되고 춘태여고 3학년 홍금숙씨만 살아남아 1989년 5공 청문회 때 국회에서 당시 상황을 증언했습니다. 
그 때 희생된 채수길씨(국립 5·18묘지 1묘역 4-88)는 버스 안에서 살아남은 3명 중 1명이었습니다. 부상을 입고 여단본부가 있는 막사로 끌려갔는데, “귀찮게 왜 데려왔느냐? 없애 버려”라 하는 상관의 지시에 따라 정OO 중사 등이 야산으로 끌고 가 두 명을 사살한 후 암매장하고 홍 씨만 헬기로 후송했습니다. 암매장된 채씨의 주검은 주민들이 시립묘지로 옮겼습니다. 그래서 다행(?)히 5·18 직후 돌아온 공수부대원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채씨는 20년 넘게 5·18 사망자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전두환 5공 정부가 채씨의 예비군 편성카드를 조작해 ‘1980년 6월 23~28일 예비군교육 이수’로 기재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채씨는 2002년에야 유전자 검사를 통해 신원이 확인되어 5·18 묘역에 묻힐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하마터면 그 날 그 버스에 탈 뻔 했던 개인사 때문에 영원히 잊히지 않습니다. 관련 기사를 편집하게 된다면 제목과 레이아웃을 어떻게 할까? 가끔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광주는 ‘임’을 부르고 싶다
5·18묘역 참배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윤상원과 박기순의 합장 묘비 앞입니다. 윤상원 열사는 5월 27일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키다 숨진 시민군 대변인이었습니다. 전남대학생이었던 그는 천주교 광천동성당에서 ‘들불야학’을 운영하며 배움의 시기를 놓친 직장인과 불우한 청소년들을 가르쳤고, 이 들불야학엔 같은 전남대학생이었던 박기순이 있었습니다. 5·18이 2년 정도 지난 1982년 2월 20일 윤상원과 박기순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망월동에 모여 숨진 두 사람의 영혼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이 아름답고도 슬픈 결혼식을 위해 만들어진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입니다. 이후 이 노래는 5·18을 상징하는 곡이 되었지만 이명박 박근혜 정권은 5·18 기념식에서조차 제창을 금지했습니다.
5·18 36주년에 광주일보는 원곡 악보 사진과 함께 ‘광주는 임을 부르고 싶다’ <지면 ③> 라는 제목으로 1면을 편집했습니다. 편집국 제작회의 중에 A4용지에 레이아웃과 제목을 그려 편집 제안을 하고 그대로 제작됐습니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아이디어가 좋은 편집으로 이어졌습니다.


가슴에 ‘확인사살’ 얼굴엔 ‘살인미소’
5·18기록관은 지난해 5월 군 보안사 편의대가 찍은 사진과 영상을 공개했습니다. <지면 ④> 속 사진은 당시 영상을 캡처한 것입니다.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을 피로 물들인 직후 작전에 참여한 박준병 사단장과 소준열 전교사령관이 활짝 웃고 있는 장면입니다. 전남대 5·18연구소 김희송 교수는 국방부진상규명위 활동을 하면서 27일 새벽 숨진 시민군들의 시신에 일정한 패턴의 총상이 있다는 검시 결과를 찾아냈습니다. 진압군이 시민군들의 가슴부위에 확인사살을 한 것입니다. ‘오월의 진실을 찾아서’ 시리즈 기사에서 그들의 뻔뻔한 미소 위에 제목을 배치해 편집했습니다. ‘가슴에 확인사살… 얼굴엔 살인미소’.
앞에서 언급한 대로 5·18의 최대 과제는 진실규명과 광주정신의 전국화 세계화입니다. 오월의 진실을 제대로 밝히지 못해 왜곡과 망언이 끊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광주일보는 지난 5·18 39주년에 ‘못 밝힌 진실 못 끊은 왜곡’<지면 ⑤>으로 1면을 편집했습니다. 발포명령은 누가 했는지, 희생자는 몇 명인지, 암매장 된 주검들은 어디로 갔는지 등 어느 것 하나 밝혀지지 않은 채 4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자료를 통한 진실규명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5·18 관련 기록 중 남아있는 자료는 신군부가 자신들의 업적(?)을 자랑하기 위해 기록한 ‘제5공화국전사’나 각 부대가 작전 실패를 반성하기 위해 작성한 ‘교훈집’, 미처 폐기하지 못하고 국가기록원에 넘긴 자료, 그리고 외신들이 각국에 전송한 사진이나 영상물뿐입니다. 광주시는 당시 미국 대사관이나 군사정보단이 백악관에 보고한 문서 내용에 희망을 걸고 모든 문서의 원본 공개를 요청해놓은 상태입니다. 남은 것은 당사자들의 증언인데 40년의 세월이 흘러 5·18의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고령이 되었고 시간 또한 많지 않습니다. 지난 연말 어렵게 출범한 5·18진상조사위의 활동이 진실규명의 마지막 기회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편집기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5월 26일 밤 당신의 선택은?
마지막으로 40년 전 5월 그날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1980년 5월 26일 밤. 27일 새벽 계엄군 3공수 특공조가 옛 전남도청에 진입하기 직전의 상황입니다.
그들은 왜 총을 들었을까. 왜 도청에 끝까지 남았을까. 카빈 소총을 들고 정예 공수부대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아닙니다.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이제 곧 끝난다는 것을. 그런데 만약 5월 26일 밤. 아무도 도청을 지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랬다면 오월 광주는 지금처럼 기억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남은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닌 평범한 시민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남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남았을까요. 이유 없이 내 가족과 이웃 그리고 친구들을 학살한 전두환과 그 무리들에 무릎을 꿇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날 밤 도청을 지킨 사람은 300여 명. 새벽 3시가 넘어서 광주시내에 가두방송이 울려 퍼졌습니다. 어떤 여성이 금남로를 돌며 외쳤습니다. “우리는 폭도가 아닙니다. 광주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왜 그런 말을 한 걸까요? 자신들이 죽고 나면 전두환이 정권을 잡고 모두 폭도로 만들 테니까. 살아 있는 당신들이 기억해 달라는 뜻입니다. 애끓는 목소리가 잦아들고 이번에는 총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길지도 않았습니다. 30~40분. 순식간에 제압당했습니다. 그러나 집에서 그 총소리를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긴~ 시간입니다. 반만년, 아니 우리 역사에서 가장 긴 새벽이었습니다. 그 새벽을 보낸 다음. 광주 사람들에게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5월 27일 상황의 기사를 편집할 땐 조심스럽고 엄숙한 마음이 듭니다. 40년이 지났는데도 그 날의 현장 증언과 참혹한 사진이 분노, 애통함, 부끄러움의 트라우마를 남겼기 때문입니다. 이미 ‘역사화’ 됐어야 할 사건이지만 제때 청산되지 못한 과거는 과거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까지 옥죄고 있습니다. 5·18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