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3> 파리로 가는 길


“진정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데 있다.”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가 여행의 본질을 간파합니다. ‘로맨스’를 살짝 끼얹은 ‘여행영화’를 소개합니다.
<파리로 가는 길>은 영화 제작자인 남편 마이클(알렉 볼드윈)을 따라 칸에 온 앤(다이안 레인)이 갑작스럽게 마이클의 사업 파트너인 프랑스 남자 자크(아르노 비야르)와 단둘이 파리행 여로에 오르면서 시작됩니다.
남편 마이클은 일밖에 모르는 사업가입니다. 부부 사이 진지한 대화보다 휴대전화 통화가 먼저입니다. 아내의 이야기는 늘 귓등으로 흘려듣고 자신의 업무 스케줄에 자승자박해서 삽니다.
53세의 앤은 그동안 아내라는 이름으로만 살아왔습니다. 늘 남편을 우선 이해해줬고 애지중지 키운 딸도 성장해 그녀의 품을 떠났습니다. 그런 그녀가 간만에 부부여행 겸 프랑스 구경에 나선 겁니다. 칸에서 출발한 여행은 남편의 갑작스런 스케줄 변경으로 당장 부다페스트로 떠나야만 합니다. 그런데 컨디션 난조의 앤은 귀앓이까지 하게 되어 비행기 탑승이 불가능해집니다. 이때 남편의 사업 파트너 자크가 파리로 직행하려는 앤에게 자신의 차로 파리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나섭니다.
서로 남남인 50대 중년 남녀가 낡은 프랑스 푸조 차를 타고 7시간의 길을 달립니다. 앤은 파리까지 직행을 원하지만, 어라? 낭만이 넘쳐나는 자크는 급행 코스가 아닌 완행의 지방도로를 택합니다. 칸~파리 사이 자기만이 아는 ‘좋은 곳’을 앤에게 다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프랑스 싱글남의 적극적인 제안에 경계심을 갖고 있던 앤은 어느덧 프랑스 남부의 아름다운 풍광과 음식 맛에 빠져들고 맙니다.
스크린엔 계획 없이 무작정 떠나고 보는 여행의 즐거움이 가득합니다. 폴 세잔의 그림으로 유명한 생 빅투와르 산과 엑상 프로방스의 보랏빛 라벤더 밭에 흠뻑 빠져듭니다. 2000년 전 로마인들이 상수도 문명을 과시하며 축조한 가르 수도교를 감상합니다. 아름다운 강변에서 마네의 명화처럼 ‘풀밭 위의 식사’를 즐깁니다.
“파리는 오늘 중에 갈 수 있느냐?”며 초조해 하는 앤에게 자크는 태연하게 대꾸합니다. “걱정 말아요. 파리는 어디 안 가요 (Paris can wait).” 바로 ‘Paris can wait’가 이 영화의 원제(原題)입니다. 들르는 곳마다 프랑스 대표 와인과 치즈를 비롯한 프랑스 전통 요리 코스가 관객의 미각 시각 후각을 강렬하게 자극합니다.
조바심을 내던 앤도 남편과 전혀 다른, 나긋나긋 낭만이 넘치는 자크와의 여행에 차츰 빠져듭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유해 안치 전설을 가진 베즐레이 성당에서 앤은 생후 1달 만에 아들을 저 세상으로 보내야 했던 아픔을 털어놓으며 눈물을 흘립니다. 남프랑스의 시골 풍광은 미국 중년여성의 마음을 한껏 위무하고 다독여줍니다.
앤은 소형 카메라로 꽃 음식 접시 초콜릿 등 눈길을 끄는 소품을 항상 촬영해둡니다. 앤은 늘 카메라 렌즈를 통해 사물의 섬세한 지점을 포착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작은 것을 통해 큰 것을 상상하게 하는 재능입니다. 자크는 부분을 통해 전체를 상상하게 만드는 앤의 촬영 솜씨를 칭찬해줍니다.
타인에 대한 마음의 빗장이 서서히 풀리고 있음을 앤도 느끼고 있습니다. 군더더기 없는 연출과 깔끔한 편집은 목적지 하나만 바라보며 뛰어가는 삶이 아닌 길 위에서 생각을 다듬고, 내면을 반추하고, 현재를 즐기는 것(carpe diem)이 더 소중하다고 속삭입니다. 앤은 길을 걸으며 삶이 얼마나 취약하고, 때론 고통스럽고, 또 충분히 멋있을 수 있는가를 깨달아갑니다.
여든 살의 엘레노어 코폴라 감독은 ‘대부’ ‘지옥의 묵시록’의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아내입니다. 다큐멘터리 연출가, 논픽션 작가, 설치미술가로도 활동했습니다. 코폴라 집안은 할리우드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감독 가문입니다. 이 영화는 엘레노어 감독이 실제로 겪은 남프랑스 여정이 계기가 됩니다. 낯선 프랑스 남자와 ‘거북이 여행’을 하며 40시간 만에 파리에 도착했던 추억이 재료가 됩니다. 6년간 시나리오를 집필한 끝에 영화 <파리로 가는 길>은 완성됩니다.
브룩 쉴즈, 소피 마르소, 피비 케이츠 등과 함께 1980년대 한국 청춘들의 스크린 우상이었던 다이안 레인(1965년생). 주인공 앤으로 멋있게 나이 들어가는 중년 여인 캐릭터를 맛깔스럽게 소화합니다.
하루하루 삶의 매너리즘이 현실을 틀 지웁니다. 젊음은 이미 떠나갔고 노화의 헛헛함만이 지루한 시간을 메우고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파리로 가는 여행길에 낯선 프랑스 남자와의 동행은 앤에게 ‘기분 좋은 미풍’으로 다가옵니다. 물론 앤은 남자의 추파를 받아주지 않고 온화한 미소로 선을 긋습니다.
여행의 힘일까요. 초반 아메리카노 커피 향처럼 지극히 절제된 앤은 영화 후반부 머리를 묶고 오늘을 즐길 줄 아는 쾌활한 눈빛으로 변해 있습니다. 남프랑스 여행을 꿈꾸는 중년 여인을 위한 최적의 영상미가 스크린에서 뿜어져 나옵니다. ‘연금술사’의 작가 파울로 코엘료는 말합니다. “여행은 언제나 돈의 문제가 아니라 용기의 문제다”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