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우리 시대의 읽기 <8> 박유진 위메프 기업소통 총괄 디렉터


축 처진 뱃살, 퍼진 엉덩이에 포동포동한 팔뚝살까지…. 거울을 보면 한숨뿐이다. 날렵했던 청춘을 추억하기에 “몸매 좀 튜닝해볼까” 운동을 시작해도 생각만큼 쉽지 않다. 편안한 소파에 늘어져 달콤한 음식을 찾던 습관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러닝머신 위에서 땀 흘리는 습관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읽기’ 역시 마찬가지. 소비자에게 알맞은 습관이 형성되지 않는다면 종이, PC, 모바일 어느 디바이스에 텍스트가 담겨있든 관심받지 못한다. 습관의 동물 소비자에게 새로운 소비형태가 관찰됐다. ‘소셜커머스’를 통한 쇼핑이 바로 그것이다. PC 생태계에서 무서운 성장세를 보인 ‘오픈마켓’이 모바일 환경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사이 소설커머스는 무서울 정도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그 성장의 배경은 소비자의 습관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 오늘도 헤아릴 수 없이 쏟아진 텍스트, 읽어야 할 사진, 소리, 영상…. 독자에게 선택받지 못하는 콘텐츠는 초라하게 버려진다. 과연 우리 시대의 독자는 읽기에 있어 어떤 습관을 지니고 있을까? 박유진 위메프 기업소통부문 총괄 디렉터에게 물었다.


―인터뷰의 핵심으로 바로 접근하고 싶다. ‘우리 시대의 읽기’ 어떻게 보는가.
‘우리 시대의 읽기는 ** 이다’ 이라 할 때 우리 시대의 읽기는 ‘자가증식’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모바일 시대 이전과 이후를 확연히 가르는 기준을 쌍방향성이라 하지만 이젠 너무 흔한 말이 되어버렸죠. 모바일을 통한 읽기는 소비자가 텍스트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호감과 반대, 자신의 감정을 즉시 반응할 수 있습니다. 과거 PC환경은 댓글 정도 남기는 수준이었지만 모바일에선 소비자가 전달자의 역할을 할 수 있어요. 내가 콘텐츠를 생산하지 않아도 생산된 콘텐츠를 읽고 내용에 동의한다면, 자신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텍스트가 들어온다면 바로 자가증식이 가능해 2차, 3차 전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죠. 이처럼 읽기의 소비자이면서 생산자, 메시지의 수신하면서 송신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읽기가 아닐까요.


―‘자가증식’을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람들이 커뮤니티에 가장 적극적으로 노출된 시간이 바로 출퇴근 시간입니다. 이전에는 잠을 자거나 책, 잡지 등 일방적으로 전달된 내용을 단순하게 소비하는 시간이었죠. 하지만 모바일 시대에 들어 밤사이 다양한 가치관을 담긴 정보를 출근 시간에 확인하고 이를 다수에게 전달합니다. 퇴근 땐 낮 시간 발생한 새로운 정보를 접하죠. 이렇게 하루 두 번의 변곡점이 생기고 이때 모바일 독자들은 자신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정보를 실어 나르고 소비합니다. 저는 이러한 현상을 아테네 직접민주주의가 모바일이란 디바이스를 통해 표현되는 것으로 생각해요.


―혹자는 모바일을 통한 메시지의 가벼움을 지적하며 ‘앙꼬 없는 찐빵’이라 비유하기도 하는데.
일정부분 동의합니다. 제가 74년생인데 우리 또래는 이전에 마주치지 못한 모바일 환경을 직장인이 돼서 접하게 됐습니다. 거리에서, 지하철에서 실시간으로 메일과 메신저를 주고받으며 업무를 처리하는 첫 세대인 것 같아요. 우리도 당황스럽고 선배 세대도 경험하지 못한 낯선 것이죠. 이 낯선 것이 지닌 무서운 ‘확산성’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충격과 함께 모바일에 담긴 메시지를 대하는 태도에 ‘착시’가 생긴 것 같아요. 종이와 마찬가지로 모바일에서도 읽기 자체의 가치는 중요한데, 이 중요성을 느낄 시간도 없이 확산성에 충격을 받아 “모바일 메시지는 확산성이 중요하고 의미는 가벼워도 괜찮아”라고 보는 착시가 생긴 것입니다. 실제로 친구에게 온 한 줄의 문자에 감동을 하는 경험을 자주 합니다. 메시지를 전하는 디바이스의 차이가 결코 내용을 지배하지 않는 것이죠. 현재 우리 세대는 디바이스의 힘이 생각만큼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실생활에서 겪으며 깨닫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사랑한다 수천 번 말해도 헤어지자 한마디에 끝나는 게 사랑이야’ 라는 구절을 들어본적 있으세요? 저는 이 말에 심장이 ‘쿵’ 했어요. 이 메시지가 모바일에서 가볍고 종이에서 특별한 무게가 느껴지는 게 아니거든요. 아날로그에 훈련된 사람들도 ‘메시지의 진정성이 디바이스를 초월하는구나’라는 것을 발견하는 분위기가 최근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읽기 플랫폼으로서 종이의 가치가 의심받고 있다. 이에 동의하는가.
단언컨대 종이는 사라지지 않아요. 지금도 서예학원이 존재하고 서예의 가치가 인정받고 있잖아요. 본질은 변하지 않을 것이고 플랫폼으로서 종이가 희소할지라도 찾는 사람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과거 ‘흥청망청한 종이 시대’를 살지 않았나 싶어요. 메시지를 종이 담았을 때 그 부가가치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있으니까 막 쓴 거죠. 거리에서 담배 태우는 사람들을 더 이상 당연하게 바라보지 않는 것처럼 종이를 함부로 쓰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더 이상 곱지만은 않은 분위기가 만들어질 것입니다. 종이에 담긴 메시지를 귀하게 여기는 시대로 갈 것 같아요.


―각 신문사의 지면을 제공하는 서비스를 모바일에서 진행했지만 반응은 냉랭했다. 뉴스 산업도 소셜커머스의 형태를 갖고 큐레이션 시스템으로 진화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심플할 것 같아요. 그 역할을 지금 포털이 하고 있기 때문이죠. 독자는 포털을 통해 뉴스를 읽는 것이 습관화됐어요. 사람의 습관은 돈을 주고도 바꾸기 어렵습니다. 세상에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 포털에 접속하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큐레이션 흉내 내기로 독자의 습관을 바꾸기 어렵죠. 아마 ‘슬라이드 캐시’ 방법을 도입해도 포털에서 뉴스를 읽을 것 같은데요. 큐레이션은 만능이 아닙니다. 그보다 먼저 소비자의 습관을 분석해야죠. 습관을 이기는 장사는 없거든요.


―그렇다면 독자의 욕망을 자극하고 습관을 형성할 수 있는 전략이 있을까.
음…. 예를 들자면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낚시 제목에 걸린, 경험 많은 독자에게 자연스럽게 생긴 습관은 어떤 것일까요. 어려울수록 본질로 돌아가라는 말이 있죠. 콘텐츠의 진정성을 예측하고 기대하는 습관이 만들어진다면 제목이 덤덤해도 내용까지 접근하겠지요. 콘텐츠를 이기는 것이 습관입니다. 그렇게 독자들이 훈련되기 때문이죠. ‘내용이 좋으면 소비자가 알아서 찾아본다. 콘텐츠만 좋아 봐라.’ 너무나 당연해서 질려버리는 이야기입니다. 희망고문 같은 것이죠. 하지만 진부하다고 사실이 아닌 건 아니거든요. 콘텐츠의 진정성, 완성도에 해답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고 이 진리 앞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우리의 숙명이죠 (웃음). 독자의 욕망에 관해 조심스럽게 제안한다면 현재 포털 중심의 생태계에서 유일하게 결핍된 부문이 ‘에디터픽’ 인 것 같아요. 만일 손석희 앵커 같은 신뢰도 높은 전문가가 각 언론사의 국정감사 관련 기사 중 00매체의 00기자의 기사를 추천해 준다면…. 전문가들의 선정한 기사를 독자의 시각으로 큐레이션, 노출된 공간이 있다면 양질의 콘텐츠를 찾는 독자의 수요가 있을 것입니다. 저라면 비용을 지불하고 찾아보겠어요. 무조건 싸게 팔아서 많이 남기는 것이 ‘장땡’인 것처럼 보이지만 백화점, 가로수길 같은 고급 매장과 소비형태가 존재하는 이유는 사회에 고차원적인 가치를 원하는 소비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수요에 맞는 집단이 있다는 것, 이것이 시장의 질서이기 때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