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2월의 마지막 날. 2차 북미정상회담 ‘하노이 쇼크’와 3·1절 100주년 특집까지 몰려 전국의 1면 편집기자들은 마음 졸였을 것이다. 어떻게 편집했을까? 동아일보는 1면 제호에 3·1절 만세 운동하는 삽화를 넣었고, 서울신문은 텅 빈 오찬장과 100년 전 태극기를 1면에 실었더라. 아주경제는 김정은과 트럼프의 사진을 전면에 싣고 ‘왜?’ 라는 제목을 크게 넣어 긴장감을 살렸다. 저마다 특색 있게 만들었다. 3월 1일 아침을 맞을 때까지 나는 잠 못 드는 밤을 보냈다. 시간이 지나도 기억에 남을 지면을 만들고 싶어서.


#2월 7일 14:00 - 공모전으로 빅픽처의 시작
2월 초 편집국에서 3·1절 100주년 콘텐츠 공모전을 열었다. 지면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내놓는 게 주요 포인트. 1등부터 3등까지 상금도 걸렸다. 액수가 제법 짭짤한데. 임도 보고 뽕도 따는 생각으로 재미삼아 기획안을 냈다. 3·1독립만세운동의 느낌을 담은 1919년판과 남북 통일이 이뤄진 미래를 가상으로 한 2119년판을 커버지로 만들자고. 2019년 본판까지 포함해 과거-현재-미래 200년을 잇는 지면이면 괜찮을 것 같았다.


#2월 18일 15:30 – 1등 당첨! 1면과 백면으로
공모 결과가 나왔다. 당첨. 그것도 1등! 성질 급한 국장께서 바로 찾아왔다. 뭘 넣고 어떻게 만들 거냐고. 스탠딩 회의 돌입. 아뿔싸! 중요한 사실을 지나쳤다. 2월 28일은 2차 북미 정상회담 이틀째 날이다. 그 결과가 3월 1일자 맨 앞에 나와야하는 것은 말해서 무엇…. 어떡하지. 머리를 굴렸다. 다행히도 레이더 돌아가듯 머리가 돌아갔다. 2119년판은 일단 빼고. 1919년판은 백면에 2019년 2차 북미회담은 그냥 1면에 실으면, 100년을 잇는 판이 브릿지로 만들어진다. 그럴 듯하다고 판단한 국장은 발 빠르게 광고국에 연락해 3월 1일자 백면 광고를 없앴다. 오피니언 면들도 앞으로 당기고, 그 자리에 3·1절 관련 특집 지면으로 메우기로 했다.


#2월 22일 16:00 - 사진을 보다가… 찢었어
대구 중구 동산동 청라언덕에는 3·1 만세운동길이 있다. 총 90계단. 1919년 판엔 이 만세운동길 계단 사진을 싣고, 100주년의 의미를 담으면 괜찮은 그림이 나올 듯 했다. 며칠 후, 사진부에서 수십 장을 가져왔다. 바로 지면에 앉혀봤다. ㄱ야ㅕㅗㅎ래ㅑㄹ쇄ㅓㄹ소ㅓ!! 화장실에서 힘줄 때보다 더 탁한 소리가 입에서 나왔다. 이게 뭐야. 실망이 컸다. 계단이 주는 입체적인 느낌이 생각했던 만큼 살아나지 않을 뿐더러 비율이 너무 어중간했다. 석장짜리 기사를 넣기로 했는데 그 자리도 뭔가 어정쩡하다. 틈 날 때마다 이리저리 바꿔가며 만들어봤지만, 실패 확률만 더 높아져갔다. 좌절감이 들었다. 아! 상금 토해내야 되나.


#2월 27일 14:00 - 부장, 바꾸면 안 될까요
계단으로는 답이 안 나오자, 원점에서 다시 생각했다. 이럴 바엔 차라리 사진을 안 싣는 게 낫겠다. 1919년 3월 1일의 편집기자라면 어떻게 만들었을까. 기미독립선언서를 전면에 뿌려볼까. 오! 그거 좋겠다. 부장께는 뭐라고 하지? 당장 내일 마감인데. 분명 한 소리 할 텐데. 4개 버전으로 간략하게 스케치해서 부장에게 스윽 내밀었다. “뭐지?”1,2,3,4 번호를 붙여 누가 봐도 방금 플러스 펜으로 샤샤샥 그린 듯한 레이아웃 종이와 내 눈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계단을 앉혀보니 폼이 안 납니다. 다른 걸로 가면 안 될까요?” 부장 자리의 조그만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거의 울듯해 보였다. 훗. 묘한 웃음을 띤 부장은 본인 마음에 드는 것으로 작업하라고 했다. 감사합니다. 어찌나 감사하던지 부장에게 백번 천번 절을 할 뻔했다.


#2월 27일 18:00 - 내일은 잘 만들 수 있을까
김정은과 트럼프가 드디어 만났다. 악수 그리고 저녁 만찬. 일단 분위기는 좋은 듯하다. 8시 40분까지는 1판 강판을 해야 되니 서둘러 작업했다. 헌데 1면에 기사 두 꼭지가 더 엉겨 붙으니 북미 정상회담 기사에 집중이 안 됐다. 내일 1면에 힘줘야 되니 오늘은 그냥 느슨하게 가자는 데스크의 말씀. 입이 삐죽 나왔다. 큰 이슈 들어갈 땐 기사 꼭지 좀 줄이면 안 되나. ‘완전한 비핵화냐, 불완전한 평화냐’ 제목도 힘을 빼서 달았다. 변수를 생각하고 달자는 얘기에. 강판 때 다시 보면서 투덜투덜했다. 촌빨 날리는 신문은 싫다고! 그러나 그 때는 몰랐다. 다음 날의 충격적인 결과를.


#2월 28일 13:00 - 기미독립선언서에 눈물을
출근하자마자 북미 회담 뉴스를 확인하며 3·1절 특집면을 작업했다. 기미독립선언서를 넣은 작업을 이어 갔다. 태극기의 태극 문양에 기미독립선언서를 넣은 버전을 만들었다. 와우! 결과는 기대 이상! 빨간 색과 파란 색을 입은 기미독립선언서는 글자 하나하나가 살아났다. 텍스트로 이루어진 이미지의 힘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1919년 3월 1일 판의 의미를 제대로 살렸다. 모니터링으로 확인한 부장은 이걸로 가자고 했다. 흡족한 듯 했다. 며칠 동안 빚쟁이마냥 쫓기던 마음의 짐을 덜었다.


#2월 28일 14:50 - 충격적인 북미 회담 결렬
3·1절 지면을 손 보고 있는데 오후 2시 50분쯤 TV에 뉴스속보가 자막으로 떴다. 북미 정상 오찬 취소 가능성, 서명식도 불투명. 곧이어 김정은과 트럼프가 오찬, 서명식 없이 정상회담장을 떠났고, 트럼프 기자 회견은 예정보다 앞당겨진다는 속보가 올라왔다. 회담 결렬. 충격적인 결과다. 빅딜도 스몰딜도 아닌 ‘노딜’이 될 거라고는 예상을 못했다. 협상의 달인 트럼프가 판을 깬 것인가? 이럴 수가. 어제 느슨하게 가자던 부장의 말씀은 빅픽처였나. 국장단과 데스크들은 긴급회의. 전면 기사로 싣기로 했던 1면에 황급히 4단 광고가 들어가고, 지면 계획은 새로 꾸려졌다.


#2월 28일 17:00 - 부장은 3.1절 특집이 그래픽 느낌이니
1면에 찢어진 서명문을 만들면 어떨까. 부장은 백면 3·1절 특집이 그래픽 느낌이 강하니 앞쪽엔 그냥 사진 쓰자고 했다. 제목은 어쩐다? 농담처럼 부장에게 던졌다. “惡手로 끝난 악수는 어떨까요?” 앞자리, 옆자리 후배들이 코웃음을 쳤다. 이 심각한 상황에 너는 첫판부터 장난질이냐는 듯. 장난 아니라고. 김정은과 트럼프가 나눈 악수가 아무 의미 없이 끝나버렸는데. 부장은 아무 말 없이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었다. 안 되는 건가.


#2월 28일 18:00 - 惡手로 끝난 악수
사진은 어떻게 쓸까. 외신에서 100장 넘게 내려 받았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굳은 표정과 트럼프의 기자회견이 한 장으로 묶여 있는 사진에 눈이 갔다. 그 사이로 제목이 들어가면 지면의 힘이 살아날 것 같았다. 묵묵히 자리에 앉아 있던 부장이 한마디 했다. “아까 그 제목 쓰자” “뭐 말인가요? 악수??” 헐. 심장이 뛰었다. 놀라울 따름. “위에서 딴지 안 걸까요?” “해보고 안 된다하면 그건 그 때 가서 생각하자”오, 멋있어! 다른 부장이었으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을 일이다. 노딜, 결렬, 무산, 비핵화 험로 등등의 단어가 나왔겠지. 좋아. 작업의 속도감을 높였다. 아래쪽 트럼프 회견 대신 트럼프-김정은의 악수 사진을 넣었다. 손을 완전히 붙잡은 것보다 손을 잡으려하는 사진이 ‘惡手’라는 단어를 뒷받침해줬다. 뭔가 불완전해 보이잖아. 얼른 대장을 뽑아서 돌렸다. 기다리는 동안의 초조함. 1면에 동음어 쓰면 ‘말장난’이라고 방방 뛰던 국장이 제목 잘 달았다고 달려 나왔다. 부국장들은 사진까지 매칭이 잘 됐다며 맞장구쳤다. 부장은 오탈자 확인하고 일단 강판하라고. 휴우.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2월 28일 22:00 – 숨 돌린 그제야 술 생각
1판 강판 내리고, 2판 돌릴 때까지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혹시나 바뀔지 모를 기사를 대비해서. 11시30분이 넘어서야 회사 문을 나섰다. 퇴근길에도 내일 신문이 잘 나와야할텐데 하는 생각 뿐. 이거 오늘도 잠 설치겠군. 신문은 하루살이라고 하지만, 이 재미로 일하는 거지. 딴 거 뭐 있어. 괜히 기분 좋아져 같이 퇴근하던 후배들에게 한마디 던졌다. “얘들아, 술이나 한잔 하러가자!”


※신문 지면에는 편집기자들의 고민과 애환이 녹아있습니다. 편집일기에 지면을 만들면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연들을 담아보려합니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을 협회로 보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