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한국일보 김진욱 기자 사진특종기
여러 신문을 들썩이게 한 이 사진
일주일도 안 돼 “너 취재로 가라”
4년간 정들은 내 친정 ‛편집’
배구대회 날 꼭 불러 주세요~


알 만한 분들은 다 아실 거다. 야근 끝나고 마시는 소주 한 잔이 얼마나 달콤한지. 물론 그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결국은 테이블 가득 병이 놓여지게 되면 야근 다음날 휴무는 지끈대는 머리와 한판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것도.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1월 2일, 새해 첫 야근을 기념해야 한다며 같이 야근을 한 선배들을 꼬셨다. 회사 옆 치킨집에서 닭 한 마리를 시켜놓기만 하고 안주는 본 체 만 체 소주에 전념하는 평소와 같은 날.
술자리가 언제 끝났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채 눈을 떠보니 집이었다. 휴대폰에는 카톡 메시지가 한가득. 대부분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이 실종됐다는 이야기. 술이 어설프게 깬 상황인지라 일단 침대에서 미적대며 뉴스를 훑었다. ‘극단적 선택을 암시하는 메시지를 남겼다’ ‘인터넷에 유서가 올라왔다’…. ‘이 친구 왜 이래’ 정도의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신재민 관악구 모텔에서 구조’ 속보를 봤다.
머리가 급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대뇌 활동에는 역시 소주가 좋은 윤활유 역할을 하는 법. 관악구 관내에서 응급상황이 벌어지면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병원이 어디일까 생각해보니 보라매병원이 1순위라는 결론이 나왔다. 속보가 올라온 시간은 오후 12시40분쯤, 현장 수습을 마치고 병원까지의 이동시간을 고려해볼 때 병원 도착 시간은 1시 전후. 그리고 우리 집은 보라매병원 도보 1분 거리. 이런 건 구경이라도 가야 하는 상황인 것이었다. 견습 때 사쓰마와리 돌 때에는 왜 이런 통밥을 못 굴렸을까 자책하며 일단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추리닝 복장에 점퍼 하나. 민머리는 겨울에 추우니 모자도 하나 눌러 썼다.
병원 앞에서 담배 한 대를 길게 빨고 있다 보니 기자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귀신 같은 타이밍에 구급차 도착. 솔직히 얼굴은 처음엔 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목’에 먼저 시선이 갔다. 목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우선 찍어야 했다. 핀이 나가든 흔들리든 이 현장은 놓칠 수 없었다. 편집기를 잡고 씨름한 4년 반, 하루에 사진 천 장을 본 가락이 있지, 누워있는 사람을 옆에서 찍으면 절대 얼굴을 포착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면을 보는 것을 포기하고 휴대폰을 높이 들어 올렸다. 얼굴만 건지면 성공이다. 정신없이 셔터를 누르고 찍은 사진을 확인했다. 얼굴이 나와 있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원에서 나와 사회부와 동기 카톡방에 사진을 올렸다. 사진부장에도 “필요하시면 쓰시죠” 한 마디와 함께 사진을 보냈다. 문득 내 모습을 돌아보니 이건 뭔 날백수의 향기가. 무릎 나온 추리닝, 맨발에 슬리퍼. 세수도 안 해서 얼굴엔 유정이 터졌고 덮어 쓴 모자는 방울 달린 어이없게 귀여운 비니. 주변 타사 기자들이 날 경계하지 않을 만 했다. 어쨌든 집에 들어와 침대에 몸을 다시 던졌다. 그때까지 침대는 따뜻했다.
다음날 아침 신문을 펼쳐 보니 사진 아래 바이라인이 달려 있었다. 다른 신문을 펴 봤는데도 익숙한 사진 아래 ‘한국일보 제공’ 이 여섯 글자가 달려 있었다. 중앙 일간지 뿐만 아니라 몇몇 경제지와 지역지까지. 솔직히 몇 개 사가 이 사진을 썼는지도 잘 모르겠다. 사진부장의 말에 따르면 거의 모든 사진기자협회 가입사가 사진을 다운받아 갔다고 한다. 물론 아무 ‘떡고물’도 없었다는 건 안타까운 현실이긴 하다.
인사철 효과였던가, 아니면 취재로 가고 싶다는 시위로 읽혔는가. 어쩌다 보니 인사 이동에 휘말렸다. 사진을 찍고 채 1주일도 되기 전에 윗선에서 “너 이번에 무조건 취재로 보낸다”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거 노리고 찍으려고 한 거 아닌데. 이건 취재 욕심이나 기자 정신이 아니라 그냥 순수한 우연의 산물인데. 어쩔 수 있나.
지난 1월 인사에서 결국은 국제부로 이동하게 됐다. 한 달쯤 됐지만 아직도 자리가 어색하다. 지금도 시시때때로 편집부에 가서 놀곤 한다. 내 친정은 편집이니까. 지금 국제부에서 그나마 헤매지 않고 기사를 쓸 수 있는 건, 편집에서 배워온 ‘야마’ 뽑는 방법에서 나온 거니까. 그 수많았던 술자리에서 스쳐가듯 말했던 수많은 방법론이 지난 4년 반 동안 머릿속에 자리잡았으니까. 결국 난 편집부를 떠났지만 떠나지 못했고 떠나지 않았다. 편집기자 배구대회 날에 불러주기를 기다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