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김용길의 미디어스토리 <19>The Reader
 


 

영화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The Reader, 2009)는 10대 소년 마이클과 30대 여인 한나의 파격적 사랑을 그려낸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은 독일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동명 소설을 인문학적 서정과 가슴 저린 영상미로 스크린에 부활시켰다. 은밀하게 감춰진 사랑이 광기의 역사와 겹쳐지면서 두 사람의 전 생애를 뒤흔들며 관통해가는 여정이 관객의 호흡을 가쁘게 한다. 한나의 집에서 시작된 소년과 여인의 격정은 몸의 사랑을 뜨겁게 보여주지만 그 사랑의 매체는 책읽기였다. 마이클의 회상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1958년부터 1995년에 이르기까지 교차 편집되면서 무지하지만 순수했던 한 독일 여인의 사랑과 소통을 스케치한다.


◇풋풋한 소년의 입술로 읊조리는 낭독
 혈혈단신 한나는 외로운 여자다. 혼자 살아왔고 검표원 노동으로 2차 세계대전 전후 궁핍의 시대에 살아남아야 했다. 불행이도 한나는 글을 읽을 줄 모른다. 글을 이해하는 척 살아왔다. 읽지 못하는 문맹의 치욕을 타인에게 숨겨야 하는 여인. 책을 읽는 타인의 낭독 소리를 듣고서야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리는 한나에게 책은 갈망의 수준을 넘어 평생 한(恨)으로 작동된다.
한나에게 마이클은 책으로 다가왔다. 풋풋한 소년의 입술로 읊조리는 낭독을 늘 갈망했다. 그녀는 뜨거운 사랑을 나누기 전, 소년에게 항상 책을 읽어달라고 했다. 읽지는 못하지만 마이클의 낭독을 통해 문학소녀가 되었고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에 눈물 흘렸다. 낭독의 경청은 한나에게 삶의 기쁨이 되어간다. 마이클은 오디세이를 비롯해 온갖 책을 읽어준다. 어느 날 그들의 기묘한 사랑은 갑자기 중단된다. 검표원으로서 근무성적이 우수해 사무직으로 승진 발령 나자, 한나는 갑자기 사라지고 만다.
8년이 흐른 1966년 독일 법정. 나치전범 재판이 진행 중이다. 20세기 최악의 범죄인 유태인 홀로코스트를 단죄하는 전후 독일사회 분위기가 법정에 가득하다. 피고인석에 앉아있는 43세의 한나 슈미츠. 참관인석엔 대학생 마이클이 법대 현장 수업 차 와 있다. 한나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마이클은 깜짝 놀란다. 숨겨놨던 첫 사랑이 전범으로 초라하게 앉아 있다. 20대 시절 한나는 때 지멘스 군수공장에서 일하다 나치 아우슈비츠수용소 감시원으로 취직했다. 나치의 광기가 수많은 유태인들을 죽음의 가스실로 몰아가던 시절, 무지몽매한 한나는 감시원으로서 조직의 명령에 따라 저승사자 역할을 했던 것이다.
전범 재판정 피고석에 앉은 혐의자들은 모두 제 몫의 과거를 부인하기 바쁘다. 단순하고 솔직한 한나만이 자신이 한 일을 인정하고 감시원으로서 명령에 따랐다고 고백한다. 비겁한 옛 동료들은 유태인 몰살 보고서를 한나가 단독 작성했다고 우기고, 재판장은 20년 전의 문서에 대해 필체 감정을 하겠다고 선언한다. 한나 앞에 종이와 펜이 주어진다. 한나의 얼굴이 파르르 떨린다.
일순간 마이클의 머릿속은 책을 읽어 달라던 8년 전 한나의 모습들이 스쳐간다. 식당 메뉴판을 보고도 마이클에게 먼저 고르라던 그녀, 모든 읽는 행위는 한사코 자신에게 미루던 한나… 마이클은 이제야 그녀의 비밀을 알아차린다. 읽지 못하는 데 무얼 쓸 수 있단 말인가.
크게 호흡을 들이 쉰 후, 한나 슈미츠는 재판정의 모든 혐의점을 인정하고 만다. 필적 감정은 취소되고 한나는 종신형에 처해진다. 문맹의 비밀을 숨기고픈 목숨 건 자존심. 천인공노할 나치범죄에 일조한 자신의 죄과를 실감하지 못하고 “먹고 살기위해 그저 상부지시에 복무만 했다”는 단순 무지함. 참관인석의 마이클은 괴로워 눈물 흘리고 속앓이는 깊어만 간다.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의 위대함
 이제 마이클은 밤마다 녹음기를 틀어놓고 읽는다. 안톤 체홉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비롯해 수많은 책을 녹음한다. 한나가 복역하는 교도소에 카세트 녹음기와 테이프 소포가 배달된다.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마자 가슴속에 간직해뒀던 마이클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어떤 편지도 첨부되지 않고 마이클의 책 낭독 테이프만 꾸준히 전달된다. 한나의 좁은 감방 한쪽 벽엔 테이프가 무수히 쌓여간다. 푸른 수의를 입은 한나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어느 날 한나는 교도소 도서관에서 안톤 체홉 단행본을 빌려온다. 책을 펴고 마이클의 녹음 테이프를 튼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읽는 마이클의 음성을 들으며 문장을 따라가던 한나는 연필을 들고 정관사 The를 주시한다. 반복되는 The를 ‘더’로 발음하는 것을 깨우친 것이다. 책을 읽는 남자가 ‘책을 듣던 여인’에게 글을 깨우치게 하는 운명적 순간. 단어발음과 단어스펠을 일치시키며 한나는 드디어 ‘글을 읽는 여인’으로 변한다.
1980년 한나 슈미츠가 생애 최초로 펜을 들어 마이클에게 편지를 쓴다. “테이프 보내줘서 고마워, 꼬마야. 사랑이야기 많이 보내줘. 내 편지받고 있는 거니? 답장 받고 싶다.” 마이클은 한나의 편지를 받고 그녀가 이제 글을 읽고 쓰게 된 것을 안다. 책을 읽으며 한나는 알아간다. 저 광기의 시대를 거치며 자신이 나치 조직의 한 일원으로서 저지른 죄과를 깨닫는다. 문학작품을 읽으며 사람의 향기가 어떠해야 하는 지를 감지한다.
영화는 나치체제의 국가폭력 과정에 관련된 인물의 속죄를 이의 없이 받아주자는 메시지가 아니다. 시대의 광기와 인간의 무지에 대해 냉정한 시선을 유지한다. 영화 전편에 흐르는 것은 책을 읽고 감동하는 것, 사람과 사람사이에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의 위대함이다. 연민과 배려가 가득 찬 낭독의 목소리가 휴머니즘의 본질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때 책은 최고의 ‘인문주의 미디어’였다.
미국 청년 제시와 프랑스 여대생 셀린느. 두 젊은이의 불꽃놀이처럼 짧았지만 열정으로 가득 찼던 비엔나의 밤을 그린 영화 <비포 선라이즈, Before Sunrise>. 비엔나 중앙역에서 헤어진 두 사람은 속편 <비포 선셋, Before Sunset, 2004> 영화를 통해 9년 만에 파리의 한 서점에서 재회한다. 제시는 뜨거웠던 두 사람의 비엔나 하룻밤 이야기를 소설로 써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단한 것. 하지만 어쩌면 연락처 하나 주고받지 못하고 헤어진 셀린느를 만나고 싶어 소설을 썼는지도 모른다. 제시는 파리 셰익스피어 서점에서 열린 ‘저자와의 대화’시간에 (꿈에도 그리던) 셀린느를 만나게 된다. 이때 책은 최고의 ‘연결 미디어’다.


◇책읽기의 양극화 해법은 뭘까
 전통 미디어와 스마트 미디어가 혼재된 요즘. 책읽기의 양극화가 극심하다. 출판 콘텐츠를 향유하는 사람들이 점점 소수가 되어간다. 동시에 책과 멀어진 이는 아예 책읽기와 담을 쌓고 있다.
책 시장의 최대 라이벌은 페이스북이다. 하루 종일 스마트폰 화면에 코를 박고 명멸하는 페북 뉴스피드만 소비하는 것. 과연 문명인일까. 혹시 또 다른 ‘문맹의 함정’ 속으로 빠지는 것 아닐까. 물론 책이 꼭 종이 위에 인쇄된 활자로만 존재할 필요는 없다. 디지털활자 디지털이미지 디지털오디오로도 충분히 변신 가능하다.
읽기와 쓰기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이고 가장 품위 있는 몸짓이다. 읽기와 쓰기의 고향 역시 책이다. 출판계의 책 만들기는 다품종 소량생산시대로 가고 있다. 책은 다채로운 편집력으로 온오프를 넘나드는 미디어로 발전한다. 인류의 최고 발명품으로서 영원한 생명력을 유지할 것이다. 책 읽은 사람, 책 멀리한 사람은 삶의 빛깔을 달리한다.
당신은 어느 빛깔로 물들 것인가. 오롯이 당신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