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에세이 <4> 오진경 북디자이너



 

책을 낸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전할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서점에서 대량 유통되는 상업출판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듣기를 바라는 희망이다. 그런 의미에서 책을 낸다는 것은 발언이다.
책이 흔치 않던 시절에도 누군가는 세상이야기를 전했을 것이다. 광장에서, 시장에서, 마당에서. 그것은 먼 곳의 전쟁소식일 수도 있고, 흔치 않은 사랑이야기거나, 신기거나, 아름답거나, 감동적이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북디자인 일을 해오면서 내가 하는 이일을 사람들에게 설명을 해야할 일이 여러번 있었다. 그럴때마다 내가 주로 전했던 것은 먼저 일의 순서를 설명하고, 그 과정에서 디자이너는 어떤 고민을 하는지, 결정의 순간에는 무엇을 판단의 근거로 삼는지 등이다. 같은 일을 하는 북디자이너들은 이 이야기만으로도 굉장히 흥미로워 한다.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북디자이너가 아닌 사람들은 언제나 이렇게 묻는다.



“그래서 북디자인은 한마디로 무엇입니까.” “북디자인은 책에서 어떤 의미입니까.”

북디자인을 가리켜 서양인들은 흔히 ‘텍스트’의 ‘집’이라는 은유적 표현을 쓴다. 표지는 그 집으로 들어가는 ‘큰 대문’이고, 표제지는 ‘현관’이며, 장표지는 ‘방문’이라는 식으로. 책을 펼쳐드는 것은 베일에 가리워진 어떤 ‘집’으로 들어가는 행위이고, 미지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하는 ‘관문’의 역할로 책의 표지를 설명한다. 북디자인은 그런 집을 짓는 일이라고.
동양에서는 사람의 ‘몸’에 비유를 든다. 책의 원고인 내용은 ‘정신’이며, 이것이 깃들 수 있는 ‘몸’을 짓는 일이 북디자인이고, 그것으로 인해 ‘책’이 완성되면, 그 책은 한 세계를 머금은 ‘생명체’가 된다는 인식이다. 이러한 두가지 인식이 지금까지 나온 북디자인에 관한 해설 가운데서는 가장 보편적 공감을 얻고 있다.
우리가 ‘책을 읽는다’고 이야기할 때의 의미는 ‘내용’이라고 부르는 ‘저자의 글’을 읽는다는 뜻으로 통한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디자이너는 책이 나오기 전 날 것의 재료인 ‘원고’를 읽고, 독자는 만들어진 ‘책’을 읽는다. 그렇다면 원고를 읽은 북디자이너와 책을 읽은 독자의 독서의 경험은 같은 것일까?
내가 읽었던 <A4원고-연금술사>와 타이포그라피와 일러스트레이션이 더해지고 부담없는 크기로 제작된 <책-연금술사>를 읽은 독자의 독서의 경험이 같을 수는 없지 않을까?
그 사이에 조금의 틈이라도 있다면, 그 공간에 북디자인이 자리한건지도 모르겠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광장을 상상해 보자. 책을 낸다는 것은 어쩌면 사람들을 모아 놓고 무대 위에 올라가는 일이다. 모였던 사람들이 흩어질 수도 있고, 끝까지 경청할 수도 있고, 애당초 모으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세상을 향해 할 얘기가 있다. 그 이야기는 큰 무대에 올라가 고래고래 목청껏 외쳐할 이야기일 수도 있고, 작은 무대에 핀 조명 한 개 켜고, 통기타를 켜며 나즈막히 읖조리는 얘기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무대를 만들까, 내가 올라갈까 배우를 올릴까, 조명은, 음악은?
어쩌면 북디자인은 광장에 무대를 마련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책을 내는 모든 이들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길 욕망한다. 전하고 싶은 얘기로 나누고 싶은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A4원고가 입체의 단정한 책이 되어 나오는 건 마술같은 일이다. 저자가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하는 무언가는 그 무언가를 이해하고 헤아렸던 북디자이너의 작업이 응집된 에너지로 더해져 책으로 완성된다. 그 마술같은 에너지가 독자에게 전해질 때, 그때 비로소 무대는 달아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