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김능옥 헤럴드경제 레이아웃룸 에디터 겸 CTS팀장


 모바일 시대, 오프라인 신문(이하 오프라인)의 시간은 저물고 있다. 어르신도 뉴스를 모바일로 소비하고 있다. 오프라인은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다.
죽음을 앞에 둔 오프라인을 보면서, 편집을-여기서 편집은 소극적 개념으로 제목만을 가리킨다- 생각한다. 편집도 오프라인과 함께 죽어야 할 운명인가.
그런데 반전이 기다린다. 모바일시대, 편집은 제목으로 살아 남는다. 모바일에선 기사 없는 제목도 놀라운 능력을 과시한다. 1보, 2보를 쏟아내며 온라인을 달구는 제목은 내용이 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터치를 유혹한다. 마치 ‘이상한나라의 앨리스’의 웃음만으로 존재하는 체셔고양이처럼. 제목은 기사 없이도 종횡무진이다. 오프라인에서도 인덱스가 기사 없는 제목의 역할을 하긴했다. 
지난 30년을 돌이켜보면 편집은 신문의 급격한 변화의 중심이었다. 납활자 조판에서 출발해서 아주 잠깐동안의 오려 붙이기, 그리고 완전한 CTS 도입, 그리고 편집기자 직접 조판시대. 그야말로 숨가쁘게 달려온 30년이었다. 단 한 번도 돌물목의 격류가 아닌 적이 없었다. 편집부문은 항상 인원 축소와 감량의 대상이었다. 항상 자본의 대척점에 있었다.
그럼 편집은 뭔가. 이쯤해서 내 나름대로 편집을 한번 정의(definition)해보고 싶다. 편집기자를 무관의 제왕이라고도 했다. 셰익스피어 글도 편집자 앞에서는 잘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도 했다. 편집자의 권한이 막강하고, 편집자의 역할이 그만큼 막중함을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거기에 동의한 적이 없다. 그저 약간의 열등감(?)만이 함께 했을 뿐이다.
그동안 묻고 물어온 편집에 대해 최근에 내 나름대로 나를 설득시킬 수 있는 정의에 도달했다.
나는 편집을 대리보충(supplement) 개념으로 접근하고 싶다. 컴플리먼트(complement)가 아니라 서플리먼트. 편집이 되어 나온 오프라인 신문이 10이라 하자, 여기서 기사가 6, 편집이 4라고 하면, 기사와 편집이 합해져서 10이라는 완성품을 만든다. 기사도 편집도 완성품의 부분일 뿐이다. 이것이 컴플리먼트다.
하지만 대리보충, 서플리먼트는 과잉(excess)이다. 기사가 10인 완전체에 편집은 혹처럼 잉여로서 달라붙는다. 여기서는 잉여가 중요하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제목은 잉여 아닌가.  이 기사에 달라붙은 잉여가 기사의 결핍을 드러낸다. 쉽게 상상해보자. 둥근 원에 혹이 멍게처럼 달라 붙는다. 이 혹을 원안으로 구부려 접어 넣어보자. 그러면 원 안에 혹만큼의 공백이 생긴다. 이 공백, 이 원(기사)의 결핍을 드러내주는 것이 바로 제목이다.
제목만으로 존재하든, 기사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카피해서 제목으로 올리든, 문학적인 수사를 동원해 기사에 없는 창조적인 제목을 올리든 그것은 그 자체로 기사의 결핍이다.
기사와 제목 사이의 간극, 이 틈이 바로 편집이고 바로 기사의 결핍이다. 모바일 시대엔 더욱 그렇다. 웃음만으로 체셔고양이처럼 제목만으로도-이 자체가 기사의 결핍 아닌가- 맘껏 날개를 펼치는 제3스크린혁명의 기린아 제목.
제목과 기사는 달라붙어 있어도 공간 위상이 다르다. 에너지도 다르다. 제목에너지가 기사를 압도한다. 공간은 칸트적 개념으로 보면 곁에 있음이다. 곁에 있어도 전혀 다른 공간적 개념이다. 부분(제목)이-논문의 작은 부분인 주(註)가 논문 전체를 뒤집어 엎을 수 있듯이-전체(기사)를 흔들 수 있다
아울러 데리다적 공간내기 개념도 적용될 수 있다. 제목은 기사라는 공간이 항상 열려서 새롭고 다양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통로의 역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