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김용길의 미디어 스토리 <16>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메타포라(metafora)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메타포라를 잘 한다는 것은 두 대상 사이에서 존재하는 동일성을 통찰한다는 것. 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는 은유(隱喩)라고 칭한다. 페이스북을 산책하면서 보고 싶거나 찾고 싶은 것은 바로 ‘은유’, 바로 ‘메타포’(metaphor)다. 그게 단 한줄 문장이든, 긴 넋두리 고백이든, 단 한 장의 셀카 사진이든, 자기만의 카타르시스든, 화려한 자화자찬이든, 얼큰한 음주 횡설수설이든…. 메타포를 구사하는 사람이 주목받고 공감력이 뛰어난 시인들이 페북계에서 맹활약하는 이유다.
‘지식의 시대’가 갔다. ‘생각의 시대’가 왔다. 암기가 아닌 발상의 시대다. 어제와 다른 ‘오늘의 생각’ 한 조각을 건졌는가. 혹은 마음을 적시는 촉촉한 ‘은유 한 조각’을 발견했는가. 은유로 단련된 페친을 만난다는 것은 기쁨이다. 왜 시를 읽는가. 詩야말로 은유의 바다이고 메타포라의 저장고다. 세상의 시인들아. 시를 써다오. 사물과 사랑을 찾아가는 길. 그대의 메타포로 밝혀다오.
페이스북에 열중하느라 당신의 생활 스타일이 달라져버린 걸 절감할 것이다. SNS를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관념을 편안하게 해주는 포스팅은 반가워하고 내 관점에 충돌하는 포스팅은 외면한다. 페이스북이 당신 삶을 더욱 산란하게 한다면 주체성을 세우지 못하고 타인의 관심을 구걸하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이 그대에게 즐거운 놀이이고 격려도구가 된다면 당신은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한계와 속성을 잘 꿰뚫고 있다.
몇몇 페북 동호인 모임 중 늘 관심 두는 곳이 있다. H출판사 팬클럽이다. 4백여 명의 회원 중심 자발적 동호회다. <지식인의 서재> <유대인 이야기>로 유명한 출판사는 매년 신간 20권 정도 출간하는 작지만 강한 출판사. 팬클럽 회원들은 출판사의 신간을 사서 보면서 독후감도 올리고 저자로도 활약한다. 졸저 <편집의 힘>도 이곳에서 출간되었다. 가끔 오프라인 번개를 쳐서 맛집을 찾아가기도 한다.
재작년 팬클럽 리더들은 ‘팬클럽 신춘문예 공모’라는 색다른 이벤트를 시도했다. 전 회원을 대상으로 산문 운문 두 개 장르로 나눠 ‘가족’ ‘얼굴’이란 주제로 글을 공모했다. 마감한 결과 산문 50편 운문 50편이 도착했다. 그런데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신춘문예 작품을 출품하는 과정이었다. ‘보통 사람들의 독서 커뮤니티’를 지향했기 때문에 글읽기 좋아하는 독서인들이 감성을 주고받으며 향유하는 과정은 지극히 따뜻하고 온유했다. 한 사람의 출품작이 게시판에 올라오면 공감 교감의 댓글들이 줄줄이 달렸다.
놀라울 만치 문재(文才)를 보이는 詩들도 보였다. 먼저 길을 떠나버린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는 애수의 에세이는 절절하다 못해 가슴을 쳤다. 감수성이 주렁주렁 달린 댓글들은 서로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아픈 상처를 위무의 악수로 다독여 주었다. 댓글은 경향각지를 아우르고 실시간으로 태평양 대서양을 가로질렀다.
아래는 그때 시 부문에 즐겁게 출품해본 부끄러운 졸시다.



< 배종옥 꿈꾸기 >


작년 봄부터 번져가는 정수리 탈모
 장마 건너오니 무릎팍도 뻑뻑해져
 다람쥐 같던 산행 길은 멀어졌다
TV드라마 ‘내 딸 서영이’ 보는 내내
 울음 터지고 눈시울 발갛게 달아오른다
 웃음 잦아들고 여차하면 눈가 젖어간다
 뻣뻣해진 엉거주춤 허리춤
 쳐지는 살점 몇 점 근육마저 메말라 간다
 호르몬 불균형의 깃발 나부끼고 있다
 매일 한 방울씩 추가되는 에스트로겐, 내 인생 뒤흔든다

거울 속 얼굴 본다
 탄력 잃은 콧등 민둥산 깎이듯 밋밋하다
 거무튀튀한 눈 그늘, 주취 깔려 늘 해질녘이다
 생의 주단으로 깔리던 젊은 추억은 언제 적이더냐
 내 얼굴은 어제의 내가 자초한 것
 내일의 내 얼굴은 오늘의 내가 초래한 것
 세상 갑인 냥 어쭙잖게 무게 잡다 볼 장 다 봤다
 소스라치게 벌떡 일어선 새벽녘 꿈
 드디어 배종옥이 나타났다

수십 년 전부터 그녀는 드라마에서 스크린에서
 심지어 내 꿈속에서 출몰해 왔다
 배종옥 코 맹맹 목소리는
 내 목소리로 연주하고 싶은 악보 위 선율
 아무도 흉내 내지 못하는 유일무이한 유성음
 짝으로 사귀고 싶은 그대가 아닌
 다음 생에서라도 살아내고 싶은 캐릭터
 푸석거리다 탄력 잃고 스러져가는 내게
 남은 여한은 배종옥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세상, 명분도 아니고 간판도 아니다
 만사 흐름 깨달아 머물지 말고 흘러갈 것
 내 여정은 배종옥을 따라 강물로 흐른다
 반평생 내 얼굴에서 중년남자를 지워내
 내일 내 얼굴에서 배종옥을 발견할 참이다
 닮고 싶은 대로 닮아 간다 했으니
 코 맹맹하게 표현하고 깔깔대고 웃으리라
 배종옥이 마음에 들어와 어깨 토닥여주니
 오늘 간만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빛나게 닦았다
 배종옥 꿈꾸니, 이제 내 얼굴이다



나의 심경 고백, 나의 인생 반추, 나의 회한 편집을 외로운 골방에서 쓸쓸하게 숨기지 않는다. 모두가 바라보는 SNS 동호회 게시판 위에서 부끄럽지만 솔직담백하게 이뤄진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담담히 나를 표현해보는 시도, 찬찬한 글을 통해 바쁘게만 살아온 삶에 잠시 쉼표 찍기,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당신도 참 아팠구나’ 동감의 어깨동무. 열심히 살아온 그 어떤 삶이라도 긍정해주고 위로해주는 시선들. 유사 이래 최초로 펼쳐지는 모바일 네트워크 세상에서 바람직한 온라인 커뮤니티의 한 전형을 발견한다.
나는 당신에게 미디어다. 당신은 내게 미디어다. 우리는 연결되어 기별의 시그널을 보냈을 때 서로에게 따뜻한 매체가 된다. 나는 당신에게 발신한다. 당신과 나의 희로애락. 온라인 솟대의 날갯짓에 실어 송수신한다. 내 마음의 글이 당신에게 가닿는다. 연필을 들어 하얀 종이위에 북북 밀고나가듯 당신의 답장이 내 마음 속에 들어오고 있다. 당신은 나의 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