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나재필의 Feel <34> 끝

“끝이라서 불행하다.”
모든 걸 내려놓으려고 마음먹었을 때, 내려놓아야한다. 만약 그 ‘미련의 염량’을 따지다보면 결국 내려놓지 못한다. 비워야 채울 수 있고, 채워야 다시 비울 수 있다는 허랑한 철학자의 변명을 억지로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끝이라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기에 행복하다.
과거를 고해(告解)한다. 그간 취흥에 이끌려 뚱땅거리기도 했고, 물산이 뻔한 허릅숭이인데도 물외에서 호강했다. 어느 한 귀퉁이도 굻거나 넘침이 없는 평미레의 삶도 아니었다. 허구한 날 술추렴을 하고, 굴신했다. 그러다보니 하루하루 궁즉통(窮則通)이었다. 가난의 땟국을 엿보다 말고, 물정 모르는 꿈도 연신 꾸었으니 허망할 따름이다.
할 말 많은 노을은 제 낯을 세우기 위해 일부러라도 하늘을 빨갛게 물들인다. 하지만 가을은 제 민낯을 들키기 싫어 일부러라도 빨간 낙엽을 지상에 내린다. 낙엽은 비움이고, 시작이다. 파릇파릇한 생명을 스스로 내려놓는 순간, 낙엽은 다시 거름이 되어 나무의 둥치를 키운다. 난, 이 희귀한 순환을 ‘에너지절약’이라고 명명한다. 지금 하고 싶은 것을 멈추는 것이 바로 진정한 생장이다. 그라운드 제로, ‘비움의 장소성’이다.
삶은 흑백에서 컬러로, 다시 컬러에서 흑백으로 넘어가며 생몰(生沒)한다. 우리 인생에는 ‘분명한 내 것’처럼 보이지만 남김없이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 있다. 힘겹게 쌓아올린 명예, 꼭 움켜쥔 재물, 미래의 불안과 생명의 위험까지도. 하심(下心)은 그래서 어렵고 슬프다. 내려놓는 것은 결국 절망을 스스로 껴안는 일이다. 절망은, 늘 돌고 돌다가 어느 시점에 보면 늘 그 자리에 있다.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돌아보면 제자리인 것이다. 그런데 비우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뭘 얼마큼 가졌는지, 뭘 얼마큼 더 가지고 싶은지, 왜 가져야하는지…. 이걸 알아야 제대로 비울 수 있다.
17개월 전, 독한 마음을 먹고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그리고 3개월 만에 16㎏을 뺐다. 몇 년 전 요요현상을 한번 겪었던지라 신경이 곤두섰다. 하지만 남들이 하는 식이요법은 하지 않았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먹는 것까지 참는다는 건 너무 가혹했다. 살을 빼는 내 자신에게도 보상을 해줘야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술청도 여전히 번질나게 드나들었다. 단, 시간을 내려놓았다. 별이 쏟아지는 야밤에도 걸었고, 땡볕이 쏟아지는 대낮에도 걸었다. 걷는 자에게 살은 정직했다. 지상의 시간을 내려놓는 순간, 몸의 시간은 온전히 꿈틀거렸다.
사람들은 놀란다. “어떻게 바싹 뺐느냐고.” 그리고 더 정직하게 묻는다. “어떻게 그리 바싹 늙어버렸느냐고.” (과도한 다이어트 때문에 늙마의 모습으로 변해버린 모습을 빗댄 말이다) 난, 말한다. “미완성인 자신을 채워나가는 일에 재미를 느껴보라고.” 몸을 비우니 마음이 채워진 것이고, 마음을 채우니 몸이 건강해진 것이다.
지상의 꿈을 내려놓으면 하늘의 꿈을 받는다. 한 번도 깨져보지 않아, 굳은살이 박이지 않은 삶은 바람만 불어도 충격이 온다. 꽃은 진흙에서 핀다. 지금 겪는 일이 싫어서 도망치는 것보다 겪으면서 그 느낌을 받아들이는 게 낫다. 아플지라도 그 자리에서 지켜보는 게 피하는 것보다 낫다. 열등감은 인간적이다. 인간이 서식하고 있는 이 도시엔 욕망들이 들끓고 있다. 22억년이 걸려 생긴 인간의 뇌는 처음부터 성숙하지 않았다. 아메바-물고기-악어-원숭이-유인원시대를 거쳐 비로소 인간이 된 것이다. 난, 인간의 웃음을 믿지 않는다. 인간은 내일 일을 모르고 희구하다 만다. 우리가 진정으로 좋은 날씨를 느끼려면 그것이 오랜 동안의 악천후 뒤에 와야만 한다.
때는 2002년, 한국편집기자협회와 인연이 되어 협회보 기자생활을 1년 남짓 덤으로 했다. 많은 사람들과 너나들이(터놓고 지냄)하는 계기가 됐다. 행복했다. 2012년부터 4년 동안은 협회감사를 맡았고, 칼럼(feel)도 34회 게재하는 영광을 누렸다. 이 또한 행복했다. 다만 말과 글을 경멸하면서, 말을 하고 글을 썼다는 점, 용서를 구한다. 칼럼에서 난 지나친 청결주의와 온정주의를 강조해왔다. 하지만 나 또한 청결하지 못했고, 온정주의 또한 아니었다. 그동안의 교유(交遊)에 감사드린다. 모든 게 ‘덕분에’ 이뤄졌다. ‘덕분에’가 아닌 것은 이 세상에 단 한 가지도 없다. 실패한 덕분에, 비틀거린 덕분에 조금씩이나마 성장하는 것 아닌가.
“끝이라서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