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이철민의 편집이야기 <7>


사진 한 장의 힘

정지된 사진이 움직이는 이미지보다는 훨씬 기억하기 쉽다. 사진은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시간의 어느 한 순간을 포착해 특권화 해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동영상보다 사진 한 장이 때론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베트남전 당시 전쟁장면을 수백시간 보여준 TV보다 더 반전 여론을 들끓게 만든 건 1972년 세계 모든 신문의 1면을 장식했던 사진, 미군의 네이팜탄에 맞은 어린이가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며 벌거벗은 채 도로로 뛰어나오던 모습이었다. 사진 한 장의 위대한 힘이다.



꼬마 쿠르디와 방송기자 파커
 시리아 난민 꼬마 쿠르디의 죽음과 방송기자 앨리슨 파커의 피격 사진도 강렬하다. 두 사진 다 심장을 마비시킬 만큼 충격적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180도로 달랐다.
파커의 사망 직전 장면을 게재한 미디어들은 전 세계적으로 거센 비난을 받았다. 어떤 언론은 “사망자 포르노”라며 맹비난 했다. 하지만 쿠르디 사진을 쓴 미디어들은 그 반대였다. 베트남 어린아이의 사진처럼 세계인들의 마음에 울림을 줬다. 결국 유럽이 폐쇄적인 난민정책을 바꾸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둘 다 죽음을 여과 없이 내보낸 충격적 사진들인데 반응은 왜 극으로 갈렸을까? 뉴욕데일리와 영국의 타블로이드 신문들이 피격 사진을 경쟁하듯 쓴데 반해 뉴욕타임스 월지 FT 가디언 BBC 등은 왜 쓰지 않았을까?



사진가의 시선, 살인자의 시각
 쿠르디 사진이 ‘우리의 양심을 깨우려는’ 사진가의 시선이 담겼다면 파커의 사망 직전 사진은 살인자의 시각만이 있을 뿐이다. 총이 발사되는 단계별 사진 속 죽음 직전의 파커가 공포에 놀라는 장면이 아직도 선명하다. 정말 잔인한 현실인데 미디어에 의해 비현실적으로 소비되는 게 역겹기까지 했다. 악용의 도를 넘었다. 뉴스가치와는 별개로 이건 좀 포토저널리즘과는 거리가 있다고 본다.



데쓰 포르노그래피
 뉴욕의 지성 수잔 손택은 포르노그래피나 악행, 불행을 담은 사진은 같은 법칙이 적용된다고 했다. 포르노를 자주 보다보면 무뎌지듯 잔혹한 사진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이 그런 사진들을 자주 접하다보면 퇴색된다는 의미다. 미디어의 홍수로 우리들은 이미 잔인한 사진에 익숙해졌다. 테러나 전쟁뉴스의 화면도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참수되거나 빠져죽거나 총에 맞는 등 끔찍한 일들이 일상이 돼 버렸다. 그만큼 잔혹함에 대해 우리가 도덕적으로 무감각해져버린 현실이 슬프다.



사진을 읽는다는 것
 사진은 보여 지는 것이 아닌 읽혀지는 대상이다. 문자가 생략된 형태로 존재하는 텍스트다. 그 생략으로 인해 사진은 보는 사람마다 느낌과 해석이 달라지기도 한다. 사진은 ‘숨바꼭질’ 하듯 숨겨진 ‘의미’들을 끊임없이 읽도록 유도한다.
잡지나 신문에서 사진을 쓰는 건 역설적으로 사진 설명을 달기 위해서다. 사진 설명을 쓰면 사진의 다중적인 실체로 인해 생기는 불필요한 ‘오해’가 제거되고 명확한 ‘사실’들만이 독자들에게 전달된다.
비트켄슈타인이 말했다. 단어의 의미는 용도에 달려있다고. 사진의 의미도 마찬가지다. 롤랑 바르트는 ‘외연’과 ‘내포’의 개념으로 사진을 이야기했다. 외연의 의미는 우리가 본 것의 단순한 인지며 내포는 사진이 사회문화적 관습의 특별한 의미가 담긴 결과물로서 외연의 의미를 넘어선다고 했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사진을 읽는다는 것은 사진에 찍힌 현상을 직접적으로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현상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



사진의 윤리적 영향력
 손택은 “사진이 윤리적 영향력 발휘할 수 있느냐는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 의식이 존재하느냐에 따라 결정 된다”며“정치적 의식이 없다면 역사를 수놓은 살육 현장을 담은 사진일지라도 비현실적이거나 정서에 혼란을 주는 야비한 것일 뿐”이라고 했다. 착취당하고, 굶주려 죽고, 학살된 사람들의 사진을 본 뒤 사람들이 드러낼 수 있는 감정도 그런 이미지에 얼마나 익숙한가에 따라 달라진다.
뭔가 새로운 것을 보여줄 때 사진은 충격을 줄 수 있다. 무서운 이미지를 퍼뜨리는 것이 그 방법 중 하나다. 편집기자들은 끊임없이 자극적인 사진쓰기의 유혹에 시달린다. 우리 신문들도 파커 사진을 경쟁하듯 썼다. 발사장면을 모자이크하고 사진을 1단으로 쓰고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부분 지면에 여과 없이 게재했다. 뭔가 ‘화끈함’을 전달하려는 욕망에 우리의 도덕적 의식이 무릎 꿇린 것이다. 경제는 몰라도 미디어는 여전히 후진성을 벗지 못한 것 같다. 왜 뉴욕타임스가 파커의 얼굴사진만 썼는지 BBC가 방송을 내보내지 안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팩트다’해서 ‘외신에 떴다’해서 무조건 수동적으로 쓰는 건 고민해봐야 될 문제다. 사진의 윤리적 영향력을 고려하자. 좀 더 나은 사회와 좀 더 격이 있는 신문편집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