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나재필의 feel <32>


허름한 선술집에 앉아 치열하게 ‘버텨낸’ 하루를 마감한다. 아침부터 밤까지 지리멸렬한 대소사를 태연하게 목도한 대가요, 문약한 지성을 졸렬한 위선으로 바꾼 대가다. 소주한잔의 회포는 결코 위로가 아니다. 남자이니까, 울지 말라는 치기다. 20년 넘게 편집 외길을 걸어왔다. 외길은 장인정신이 아니라 그냥 ‘외곬’이었다. 그 길을 단 한 번도 부끄러워한 적이 없었건만 갈수록 부끄러워지는 건 왜일까.

한때 시인이 되고자 문학 동네를 기웃거렸다. 하지만 등단한 곳은 조그마한 계간지였다. 한때 시나리오작가가 되고자 충무로를 얼쩡거렸으나 끝내 영화판에 끼지 못했다. 한때 소설가가 되고자 골방에 처박혀 삼류 저질의 모사를 꾸몄지만 실패했다. 제발 소원컨대, 안락한 종묘사직의 길을 택하라는 부모의 청도 듣지 않았다. 그래서 기자가 됐다. 기자는 서생(書生)이다. 남의 집에서 일해 주며 공부하는 사람이고, 세상일에 서투른 선비다. 그래서 방안퉁수(숫기가 없어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못하고 집안에서만 큰소리치는 짓)가 많다. 종일 앉아서 글을 선택하고, 지우고, 남기고, 자기 맘대로 재단하니 기억의 편집이다. 무엇을 살릴 것인가, 무엇을 버릴 것인가. 한 남자로서, 혹은 여자로서 좋아해도 좋은가, 어떻게 좋아해야 하는가. 또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결국 편집기자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문자(文字)들만 남기고 나머지를 버리는 역할이다. 어쩌면 지우개일 수도 있고 몽당연필일 수도 있다.

인생은 누구나 처음이다. 매일 마주하는 모든 시간이 처음이다. 누구나 처음 태어나 처음 살아보는 것이니 당연히 서툴다. 인생은 동시에 생방송이다. 녹화방송을 할 수 없다. 하지만 NG없는 인생은 없다. 단지 편집을 할 수 없을 뿐이다. NG가 나면 다시 찍으면 된다. 넘어져보지 않고 설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한편의 영화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NG가 나오는가. 우린 애써 모르는 척, 기억나지 않는 척, 사실이 아닌 척하며 NG를 숨긴다. 영화나 드라마는 NG를 내보내지 않지만 인생은 NG가 나도 그대로 나간다. 그러니 영화나 드라마처럼 살려고 애쓰지 말자.

편집도 생방송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편집을 하지 않으면 상대방으로부터 편집을 당한다. 공백을 만들고 다시 채우고, 지면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은 그래서 고단하다. 때문에 살짝 미쳐야 즐겁다. 편집의 모든 것은 재미를 위한 것이다. 재미없으면 가차 없이 잘려나간다. 그러려면 포기할 줄 알아야한다. 좋은 거랑 더 좋은 게 있을 때 더 좋은걸 택하고 그냥 좋은 건 포기하는 거다. 다 가질 수도 없거니와, 욕심을 냈다가는 다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날의 편집은 그날 잊어야한다. 나만 잊어버리면 없던 일이 될 수 있다. 잊고 싶은 기억은 지워버리고, 기억하고 싶은 기억만 붙여버리는 것이다. 기억은 기록이 아니다. 기억은 사실이 아니다. 기억은 편집된다. 기억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우리의 인생을 마음대로 편집할 수가 있다면, 사람들은 편집돼 사라진 부분만을 더욱 보고 싶어 할지 모른다.

어젯밤 ‘필름이 끊긴’것은 기억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기억을 편집한 것이다. 남들이 기억을 못하길 바라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아픈 기억에만 관심을 갖고 잘 편집된 삶은 오히려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때문에 자꾸만 봉인된 부분을 열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기억은 마음대로 편집해서 원하는 것만 간직하려 드니 이리저리 찢기고 누덕누덕 기운 것처럼 돼 버린다.

어느 날 밤, 어두운 길을 지나는 할머니를 누가 자꾸 불렀다. “같이가 처녀,같이가 처녀.” 주위에 아무도 없자 할머니는 “나도 뒷모습은 아직 괜찮은가 보네” 여기며 발길을 재촉했다. 다음날 보청기를 끼고 같은 장소에 간 할머니 귀엔 이런 말이 들렸다. “갈치가 천원, 갈치가 천원.”

우스갯소리지만 실제로도 이런 일은 드물지 않다. 기억 저편에 있는 망상의 편집이다. 단순한 사실을 아는 데 흘려버린 몇 십 년은 비싼 수업료다.
우린 정말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내가 편집한대로 살고 있는가. 삶에서 모든 선택은 우선순위를 가리는 행위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종이 한 장 차이로 갈리는 경우가 많다. 그 소소한 차이는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일에 달렸다. 버려야 할 것은 즉시 비우고 쌓인 것은 치워야 한다. 하나의 키워드로 자신을 말할 수 없다면 그것은 욕심 많은 인생이다. 짧은 인생은 어느 사이 훅 간다. 앞만 보고 달리지 말고, 어디를 가고 있는지 깨달아야 늦지 않다. 누구를 혹은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삶을 편집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