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나재필의 Feel <29>

어제오늘의 변고는 아니지만 편집의 위기는 분명히 왔다. 박절하고 절박하다. 오퍼레이터로 전락하는 거 아니냐며 불평을 털어놓던 시절의 얘기도 이제 감흥이 없다. 세상은 다윈이 말한 것보다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편집’은 종이신문의 질감만 따지고 있다가 창졸간에 봉변을 당하고 있다. 서로에게 안녕하냐고 묻다가 봉변을 당하고 있다.

다(多)미디어시대에서의 편집은 스스로 살 궁리를 하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좋은 편집만 하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계산은 순진한 착각이다. 편집시장에서 얼마나 오래 버틸까를 고민하다간 늦다. 문명사회의 짤막한 문맹어(文盲語) “너, 나가”라는 소리를 듣고 난 뒤엔 이미 늦다.

편집기자가 편집동네를 떠나 새로운 직업을 가졌을 때 성공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단언컨대 너무도 낮다. 편집기자가 오로지 편집만 해온 건 장점이자 치명적인 단점이다. 좋게 말해 장인정신은 그것밖에 할 수 없다는 반어법이다. 온실 속 지면(紙面)에서 살다가 바깥세상에 나오면 찬바람만 휘하니 불 뿐이다. 나쁘게 말하면 방안퉁소(실력·자신감이 없어 퉁소를 방안에서만 연주한다는 뜻)다.

어느 쪽을 택할지 고민하지 않는 사람이 가장 무섭다고 했다. 때문에 작은 희망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거기에서 답을 구할 수밖에 없다. 편집(編輯)을 지키는 것은 편집(偏執)을 버리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린 편집으로 밥벌이를 해왔지만, 동시에 ‘밥벌이의 편집’에 대해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다. ‘현재의 인생’은 아주 멋들어지게 편집하면서 ‘미래의 인생’에 대해선 숙맥처럼 편집했던 것이다.

편집기자는 ‘읽는’ 것에만 익숙하고 ‘쓰는’ 일엔 젬병이다. 수십만 장의 텍스트를 읽으며 그 행간에서 해답을 구하면서도, 쓰는 일엔 경외(敬畏)했다. 그런데 이젠 ‘읽을 것인가, 읽혀질 것인가’의 문제, ‘읽기만 할 것인가, 쓰기도 할 것인가’의 문제를 생각해볼 때가 됐다. 달리 말하면 ‘읽지만’ 말고 ‘쓰기’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건 절박한 생존의 계산이다. 왜냐하면 편집만 해서는 밥벌이가 되지 않는다. 취재기자의 ‘글’을 쓰레기통에 버리긴 쉬워도 막상 편집기자가 ‘글’을 잡으면 더 많은 양의 ‘글’이 버려진다.

구텐베르크가 ‘읽기’ 권력을 대중화시켰다면 인터넷은 ‘쓰기’ 권력을 대중에 개방했다. 이제 인간은 남몰래 혼자 글을 쓰지 않는다.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등 남들이 알게 쓴다. 읽기와 쓰기가 연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정보를 걸려내기 위해서 ‘읽기’만 능하면 됐지만 앞으론 쓰레기 정보를 걸려내기 위해서 ‘쓰기’에도 능해야한다. 사람들이 누르는 ‘좋아요’는 진짜 좋은 게 아니다. ‘좋아요’는 그냥 지나치기엔 섭섭하니까 슬쩍 눌러주고 가는 ‘그저 그런’ 습관이다.

13년 전, 편집기자이면서 글을 쓰는 ‘특혜’를 받았다. 편집의 패러독스(역설)였다. 그건 전향이 아니었다. 변절이 아니었다. 외도는 더더욱 아니었다. 단지, 걸어가 보지 않은 그 길을 잠시 걷게 됐을 뿐이다.

300자, 500자, 1000자…. 하루하루 문장의 길이와 부피를 늘려가며 시간의 절멸을 느꼈다. 어떤 글은 지면에 실렸고, 어떤 글은 버려졌다. 그건 두려움이었다. 쓰면서 동시에 버려진다는 건 그리 간단한 ‘사건’이 아니다. 더 황당한 일은 버려지기 위해 쓰고, 비워지기 위해 또 썼다는 사실이다.

난 여전히 글을 쓰고 있다. 칼럼도 쓰고 사설도 쓰고 기고도 쓴다. 물론 ‘밥벌이’를 위한 것은 아니다. 돈벌이도 되지 않는다. 다만 향후 ‘벌이’가 될지도 모를 일에 투자하는 것이다.

깊은 새벽, 혼자만의 방에 불을 밝히고 글을 쓴다. 모든 두려움과 회의를 뚫고 섬광처럼 찾아든 영감을 좇아 써내려간다. 그러다 이내 멈춘다. “이게 아닌데. 형편없어.” 다시 이어지는 회의와 자기 불신…. 때로는 당혹스럽고, 때로는 당황하지만 그래도 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쓰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법’ 아니라 ‘밥’이다.

피고 지는 꽃처럼, 편집도 피고 진다. 정답 없는 이 일에 목숨 거는 건 지겨운 밥벌이를 끝내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물론 정답이 없다는 것이 정답일 수도 있다. ‘오른쪽’이 반드시 ‘옳은 쪽’이 아니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