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나재필의 Feel <28>


“나의 전부를 벗고/ 알몸뚱이로 모두를 대하고 싶다/ 그것조차 가면이라고 말할지라도/ 변명하지 않으며 살고 싶다/ 말로써 행동을 만들지 않고/ 행동으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나는 혼자가 되리라.”
 ‘홀로서기’의 시인 서정윤은 아름다운 서정시를 남겼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시(詩)처럼 서정적이지 못했다. 말로써 행동을 만들지 않겠다던 국어교사 서정윤은 열네 살 여중생을 교무실로 불렀다. 그리고 입 맞추며 껴안았다. 변명하지 않으며 살고 싶다던 그는 법정에서 구구절절 변명하기에 바빴다. 벌금형을 맞고 학교에서 잘린 시인의 책은 330만부나 팔렸다.
“옥수수 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 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시인 도종환은 결혼 2년 만에 아내를 불치의 병으로 떠나보냈다. 시인에겐 넉 달 된 딸아이와 세 살 된 아들이 있었다. 시인은 그 울부짖음을 ‘접시꽃 당신’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사별한지 6년이 지난 후 시인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순정을 대변하던 ‘접시꽃 당신’은 졸지에 ‘담쟁이 당신’이 됐다.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는 그의 시어에선 그 다음부터 향기가 나지 않았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며 세상을 일갈하던 안도현 시인은 진짜 뜨거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대선 때 공직선거법 위반혐의로 전과자가 됐다. 서정윤, 도종환, 안도현은 모두 중고등학교 교사 출신들이다. ‘울면서 시를 써야 남들도 울면서 시를 읽는다’던 이들의 홀로서기는 어쩌면 ‘홀로 살기’였다. 인생이란 둘이 만나는 게 아니라, 홀로 선 둘이가 만나는 것이라 했던가. 하지만 홀로 선다는 건 가슴을 치며 우는 것보다 더 어렵다.
단언컨대 겨울은 변절의 계절이다. 인생의 멱살이라도 잡아보고 싶어서 그런지, 겨울이면 그냥 저리다. 나무가 하필이면 겨울에 옷을 벗는 것도 이유는 있다. 봄엔 살갗이 간지러워서 그렇고, 여름엔 싱싱한 젊음을 털고 싶지 않아서 옷을 붙잡는다. 또한 가을은 봄?여름의 무성하던 잎들을 그대로 달고 서 있기에 탈의하지 못한다. 결국 겨울이 돼서야 일 년을 무사히 넘긴 허허로움으로 두툼한 외투를 벗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홀로서기가 아니다. 생각해 보라. 찌를 듯이 강렬하던 태양빛도 동장군 앞에서는 기가 눌리지 않는가. 오로지 여윈 햇살 하나 의지하고서 이 버거운 시절을 근근이 버텨내는 것도 재주다.
사람도 홀로서기엔 나약한 존재다. 홀로살고는 있으나 어쩌면 홀로 버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의 일광욕을 즐기기엔 그 햇살이 너무도 약하다. 삼복염천에 지치거나, 이한치한을 겁내거나 우린 끙끙댄다. 제 몸에 걸친 외투를 켜켜이 껴입고서도 오한이 나는 게 삶이다. 때문에 홀로서기와 홀로살기는 분명히 구분 지어야 옳다. 남들이 보기엔 그냥 홀로서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홀로 사는 것일 뿐.
시인들의 변심과 나무들의 변절과 사람들의 변덕은 그래서 외롭고 괴롭다. 우린 어디에 서 있는가. 발밑이 까마득한 절벽인데 아주 태연하게 삶을 경청하고 있다. 버선발로 작두위에 서는 일이나, 벼린 발로 번지점프 위에 서는 일이나 모두 두렵다. 안전장치는 해제됐다. 이제 뛰어내릴 일만 남았다. 자유를 느끼기 위해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얻기 위해 홀로 서야한다.
편집‘쟁이’는 홀로 살수는 있어도 홀로 설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같이 가야하는 ‘업(業)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이 ‘업(業)은 숙명이다. 물론 혼자 사는 일이 홀로서는 일이라고도 착각하지 말라. 누가 먼저 이 엄청난 팩트를 깨닫느냐가 문제다.
‘한 장의 꽃잎으로는 꽃이 완성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