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이철민의 편집이야기 <1>


 

트벤(TWEN,1959~1970)은 세계 편집디자인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60년대 독일 잡지다. 스프레드(펼침면) 편집과 과감한 크로핑, 클로즈업 등 트벤이 보여준 파괴적 혁신은 시대를 뛰어넘어 지금 봐도 혁명적이다.
1950~60년대는 사진식자술의 확산과 함께 혁신적 디자인들이 쏟아진 ‘잡지의 르네상스’ 였지만 한편 위기의 시대이기도 했다. 컬러TV의 보급 확대가 메인 미디어였던 잡지의 위상을 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21세기에 60년대 잡지 이야기를 꺼내는 게 조금 생뚱맞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TV의 위협에 맞서 트벤이 내세웠던 공격적인 디자인 전략들을 살펴보면 지금 디지털의 위협에 맞서 신문이 어떤 편집 전략을 취해야 할지에 대한 힌트를 찾아낼 수 있다.
◇플렉하우스, 인간의 머리를 잘라 버리다
 스물(twenty)에서 이름을 따온 트벤은 독일 전후세대의 ‘젊음’을 대변했다. 섹스 동성애 로큰롤 정치 인종 인권 등 민감한 내용을 다뤘지만 텍스트의 지적 깊이감 때문에 당시 지식인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디자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트벤의 아트디렉터 빌리 플렉하우스(Willy Fleckhaus, 1925~1983)는 아방가르드적인 비주얼과 레이아웃, 타이포그래피로 명성을 떨쳤다. 피부결이 느껴질 정도로 신체의 특정부분을 최대한 줌업했다. 2~3장의 사진들을 크게 키우거나 아주 작게 줄여 극단적인 대비감을 만드는 스타일로 시대의 편집상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당시의 사진쓰기 기준은 신체의 전체적인 부분을 함부로 잘라내선 안된다는 것이었지만 플렉하우스는 철저히 거부했다. 눈을 강조하기 위해 이마와 턱을 밀어버리거나 가슴을 강조하기 위해 목까지도 다 잘라내 버리는‘만행’을 저지른 탓에 사람들로부터 ‘인간의 머리를 잘라내 버리는 인간’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시각규범을 뒤흔든 1대1의 법칙
 플렉하우스는 사진의 이미지가 실제비율로 구현될 수 있도록 신체와 지면을 1대1로 만나게 했다. 지면에 실리는 얼굴과 손 등의 이미지는 잡지를 보는 독자들의 얼굴, 손 크기와 같거나 커졌다. 크로핑과 클로즈업된 사진들은 독자들에게 평소에는 안보이던 것들을 보이게 만드는 시각적 충격을 던져줬다. 또 이미지들이 풍부한 느낌을 잘 전달할 수 있도록 검은색 바탕과 과감한 여백을 자주 사용했다. 그는 1대1의 법칙과 극대극소의 대비, 검은색 바탕과 여백 등을 통해 시적(詩的)인 비주얼 이미지를 만드는 데 탁월했던 것이다.
플렉하우스는 트벤을 통해 TV 못지않은 이미지의 힘을 이끌어냈으며 영상과 이미지시대의 새로운 대안들을 만들어 갔다. 흑인의 인권 등 현실(reality)의 논쟁거리들을 볼드한 타이포그래피와 시처럼 압축적인 텍스트, 개성적인 사진들을 통해 감성적 지면으로 구현해 냈다<사진6>. 시대의 이슈를 감성적인 르포르타주(reportage)로 만들어 내 저널리즘의 새로운 형태를 제시했다. 문자 중심의 저널리즘을 시각 중심으로 이동시켜 버린 것이다.
◇펼침면에 감성적 충격을 가하라
60년대 사진 르포르타주의 새 장을 연 잡지‘라이프’가 연출방식에 있어서 직접적이고 사실적이라면 트벤은 간접적이고 은유적이었다. 플렉하우스는 펼침 면에 감성적인 충격을 가하는 사진다루기를 즐겼다. 두 페이지에 걸쳐 여자의 입술을 꽉 차게 넣는 식이다<사진>. 265X335mm 판형에 12단 그리드를 기본 골격해 하나의 이미지를 꽉 차게 쓰거나 여백을 과감히 끌어다 썼다. 그에게 있어서 사진은 단순 보도의 기능을 넘어 문학적 힘을 지닌 하나의 텍스트였다.
플렉하우스의 펼침면 편집은 노바(1965~1975)잡지의 데이비드 힐만과 더선데이타임즈매거진의 윌 홉킨스 등 60년대의 수많은 디자이너들이 추종하며 따랐다. 훗날 신문편집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영국의 가디언도 지난 2005년 베를리너 판형으로 전환하면서 이런 펼침면 전통을 신문지면에 적극적으로 끄집어내 썼다. 파이낸셜타임즈 등 유럽 신문들은 이 펼침면의 원칙들을 지면 밑에 숨겨 두고 사용한다. 왼쪽 면에 줌인된 사진을 쓰면 오른쪽 면은 줌아웃된 사진 등을 써 의도적으로 콘트라스트를 만드는 식이다.
◇지적 무게감을 담은 FAZ 매거진
1980년에 플렉하우스는 독일 일간지 프랑크푸르트알게마이네짜이퉁(Frank furter-Allgemeine-Zeitung)의 주말매거진(이하 FAZ 매거진)을 통해 또 한 번의 편집혁신을 보여줬다. 편집디자인 면에선 트벤에 대한 안티테제였다. 강렬하고 파격적인 트벤과 달리 잔잔하면서 지적이고 무게감 있는 세련된 디자인을 많이 쏟아냈다. 신문잡지적 특성에 맞춰 그리드에 충실하고 눈에 띄는 기교를 피했지만 그러면서도 일러스트레이션을 크게 쓰고 과감한 여백에 글줄길이가 좁은 칼럼 등 트벤에서 보여줬던 그의 고유한 스타일은 여전히 힘을 발했다. 1983년 그가 죽은 뒤에도 제자 한스 게오르그 포스피쉴이 후임으로 아트디렉팅을 맡아 그의 디자인적 전통을 이었다.
◇“늙은 감성으로만 죽지 말자”
저널리스트로 출발했던 플렉하우스는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관점과 철학을 시각적 이미지로 풀어내는 데 천재적인 감각을 보여줬다.‘늙은 감성으로만 죽지 말자’라고 자신의 노트에 써 놓기도 했던 젊은 감성의 소유자였다. 그가 남긴 디자인의 유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지금 우리들에겐 편집의 오랜 관습을 깨고 판을 뒤엎을 수 있는 치열한 고민과 시도가 필요한 때가 아닐까. 후배들에게 말하고 싶다. 플렉하우스처럼 그대들의 젊은 감성이 지면에 끝없이 살아 숨 쉬게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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