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2> 키워드



캠프5를 떠나온 지 9시간째, 어디가 어딘지 모든 것이 하얗다. 정신까지 햐얘지려는 순간 남자가 셰르파를 향해 소리쳤다. “이상해, 어느 쪽이지?” 주위를 둘러보던 셰르파가 갑자기 다가오더니 남자를 껴안았다. “여깁니다. 우리가 해냈어요.” 남자는 한동안 멍하니 서있었다. 눈물이 나오려다 얼어붙었다. 무전기를 꺼내는 그의 손엔 감각이 없었다. 캠프 쪽의 다급한 질문이 잡음에 섞여 들렸지만 정작 말이 뱉어지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번 숨을 힘껏 들이쉬었다.
“여기는 정상,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다.”


단어 하나가 신문을 바꾼다
1977년 1인당 GDP가 ‘절대 빈곤선’이라는 1000달러(지금의 북한 수준)를 갓 넘어선 나라가 있었다. 그로 인해 유엔의 원조대상국에서 벗어났으며, 그에 힘입어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는 노래가 동네마다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러던 그해 9월 그 나라 남쪽 섬 출신의 한 사내가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정복했다. 세계 국가 중 8번째였고 5년간의 시도 끝에 이뤄낸 쾌거였다.다음날 아침, 프로젝트의 주관사이면서 제일 먼저 소식을 전한 신문사엔 독자들의 격려 전화가 폭주했다. ‘아침 신문에 감격했다’는 말과 함께 ‘1면 제목을 보고 눈물이 났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제목을 보고 눈물이 났다니, 신문 편집자로선‘응답하라 1977’이라도 찍고 싶은 이 드라마의 배경은 헐벗은 대한민국이고, 주인공은 산악인 고상돈이며, 신문사는 한국일보였는데, 그날의 1면 헤드라인은 ‘고상돈, 에베레스트 정복’이 아니고, ‘한국 최초 에베레스트 등정 성공’도 아니었으며, ‘마침내 우리가 해냈다’ 도 아니었다.
<세계 정상에 우리가 섰다>였다.
세계 정상. 지금은 흔하게 들을 수 있지만 40년 전엔 온 국민을 울컥하게 만든 키워드였다. 당시 한국일보의 편집자는 세계 최고의 산봉우리에 태극기를 꽂았다는 기사적 사실보다 훨씬 더 높이 올라가 국가적 자부심과 희망을 신문 지면에 꽂았다. 


무엇이 키워드인가
“기사를 뚫어져라 쳐다봐, 그럼 뭔가 툭 튀어나와, 그게 제목이야”
신입 시절 출고 기사 앞에서 쩔쩔매고 있는 내 어깨를 툭 치며 어느 선배가 말했다. 그런가? 제목 잘 달기로 유명한 선배여서 따라해 보기로 했다. 원고를 집어들고 한참을 보고있는데 어라, 정말이지 신기하게도 번쩍,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제목이.
데스크에게 제출했더니(당시엔 원고의 여백에 직접 제목을 적어 데스크의 데스크 위에 놓았다. 데스크의 빨간 펜에 죽느냐 사느냐가 문제였는데 대부분 죽었다) 어쭈 이 녀석 봐라, 하는 눈으로 쳐다봤다. 그날 우리 팀이 회식을 한 건 신참이 멋진 제목을 달아서였다고 아직도 나홀로 주장하고 있다.
그 종교적(?) 경험 이후 나는 기사 원고를 무작정 쳐다보는(읽는 게 아니다 그냥 본다) 버릇이 생겼다. 하지만 번번이 역시나 ‘그분’은 오시지 않았다. 좀 더 고민을 해보라는 게 선배의 의도였겠지만, 중견 기자가 된 지금도 딱 들어맞는 단어나 표현이 떠오르지 않으면 원고를 쳐들고 ‘제툭튀’란 이름의 그분을 간절하게 기다리게 된다. (어쩌면 그 선배는 정말 초능력 비슷한 게 있지 않았을까)
제목 달기는 콘텐츠의 핵심을 뽑는 일이다. 하지만 이 말이 콘텐츠의 내용 중에서 골라내라는 뜻은 아니다. 기사의 단어만으로도 퍼즐이 맞춰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아귀가 맞지 않거나 중요한 조각이 빠져있기 마련이다. 이것도 키워드고 저것도 키워드인 것 같아 뽑다 보면 '명사 나열의 참사'가 벌어지기도 한다.
키워드는 기사의 핵심을 포함하면서도 쉬워야 하고, 인상적이어야 하고, 그래서 독자들의 뇌리에 바로 새겨질 수 있어야 한다. ‘이 단어 하나로 기사의 열독률을 좌우할 수 있는가’ 스스로 질문을 던졌을 때 ‘그렇다’고 말할 수 있어야 키워드다.


키워드, 없다면 만들어라
콘텐츠에서 키워드를 골라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기사의 내용을 편집자가 꿰고 있어야 가능하다.
하지만 취재기자가 놓치는 내용이나 표현이 있을 수 있고,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전문용어가 등장하기도 한다. 편집자의 안목과 능력은 콘텐츠가 허술할 때 제대로 발휘된다.
1월10일 중국의 폭격기가 우리 방공식별구역을 침범했을 때, 폭격기에 대한 해설기사가 여러 신문에 올랐다. 공식명칭은 ‘H-6’ 또는 ‘훙-6’로 불린다는데 제목으로 달기엔 생소하고 의미도 안 통하는데다 재미까지 없다. A신문은 ‘핵 싣는 중국 폭격기’라고 했고 B신문은 ‘중국판 B-52’라고 제목을 달았다. 어느 것이 더 와닿는가.
때론 사진이 키워드를 말해주기도 한다. 2월16일자 거의 모든 신문이 김정남의 암살 용의자 사진을 1면에 배치했다. 주요 일간지 중에선 두 신문이 여자 용의자의 외모에서 키워드를 뽑았다. 한 신문은 ‘짙게 바른 립스틱’에, 다른 신문은 ‘LOL 티셔츠’에 주목했다.
인상적인 스토리 또한 키워드가 된다. 스포츠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배추밭 보더’ 하면 아하, 할 것이다.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첫 스노보드 금메달을 땄고, 배추밭에서 연습했다는 일화로 잘 알려진 이상호 선수다.
그 날짜 신문들을 보면 ‘배추밭서 썰매타던 소년’에서부터 ‘배추밭 뒹굴던 소년’, ‘배추밭 보드 꼬마’까지 다양한 제목이 등장하지만 역시 ‘배추밭 보더’라는 표현이 가장 오래 남는다. 배추밭 스토리를 아예 빼고 ‘이상호가 금 땄다’는 식의 제목만 내세운 신문들도 있었다. 짧고 강렬하지만 자꾸 ‘배추 도사’의 헤어스타일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제툭튀, 편집자 하기에 달렸다
“없으면 만들라고? 말이 쉽지, 어떻게?” 젊은 편집자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물론 어렵다. 인터넷도 뒤지고 예전 신문도 찾아보고 노력을 해야 한다. 나의 예를 들자면 하나 더, 구어체 편에서 얘기했듯이 여기서도 ‘대화’가 중요하다.
기사를 대충 보고(자세히 봐선 안된다. 기사에 묻힌다) 한 번에 이해되지 않으면, 혹은 키워드 비슷한 거라도 없으면, 직접 취재 기자에게 물어보라.
“이 기사 도대체 뭔 말이야?(말이에요?)”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보면 기사에 빠졌던 내용도 나오고 키워드의 윤곽도 잡힌다. 취재기자 쪽에서도 ‘아, 그 부분은 재미가 없구나’ 기사를 다시 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도 있다. 그러니 취재기자를 활용하라. 가끔씩 회사 가까운 중국집에서 점심이라도 하며 대화하라. 어느 순간 짬뽕 국물이 튀듯 제목이 툭 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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