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4. 파격> 

 

 

 

신입기자 때를 기억한다. 선배들은 의욕에 넘쳤고 편집국의 책상이나 원고들도 에너지로 가득차 보였다. 그 시절 출근길의 신문사 건물 로비, 깔끔하게 유니폼을 차려입은 경비 아저씨를 지나 엘리베이터의 반짝이는 금속 문을 왼쪽으로 돌아나가면 대리석 계단이 있다. 3층 편집국을 향해 성큼성큼 오르다가 계단과 계단 사이 꺾어지는 벽 앞에 멈춰 선다. 세로로 긴 액자가 걸렸고 하얀 종이 위에 묵필로 쓴 글이 보인다. <기자는 시인이 돼야 한다. 미래의 신문은 시와 그림으로 가득찬 신문이다.>

장기영 한국일보 창업주의 어록을 담은 그 액자를 3년 남짓 보면서 출근했다. ‘그런 신문이 가능할까’ 마주할 때마다 의심하면서도 그 글이 마음에 들었던 건, 무언가 예술적인 일을 하는 것 같고, 펜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도 같고, 그런 직업을 택한 내가 잘나 보인다는 착각을 할 수 있어서였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그 착각과 함께 신문사 건물이 헐리고 다른 빌딩이 들어선 지금, 액자의 행방은 알 수 없지만 ‘시와 그림으로 가득찬 신문’에 대한 궁금증은 남아있다.

 

#파격, 메시지로 독자를 때리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자. 2000년 1월 1일, 장기영 사주의 글귀가 아직 3층 계단에 붙어있던 그날에 한국일보가 ‘대형 사고’를 쳤다. 새로운 밀레니엄의 첫 신문, 그러니까 1000년에 한 번 만들 수 있는 지면이란 생각에 편집자가 흥분했을까. 1면에 기사도 사진도 없었다. ‘2000년 1월 1일’이란 글자가 제목처럼 박혔지만 당일 날짜를 적은 것으로 본다면 사실상 제목도 없었다.

새해 첫날 ‘백지 1면’을 받아든 독자들은 순간 머릿속이 백지로 변하는 기현상과 함께 잠깐 전날 마신 술을 의심했다가 돌연 그 전날 마신 술까지 확 깨는 낯선 경험을 했다. 편집국엔 ‘Y2K(컴퓨터가 2000년의 연도를 인식하지 못해 발생하는 디지털 재앙)’ 탓에 인쇄사고가 난 게 아닌지 문의하는 전화가 빗발쳤다.

그날 편집자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충격을 주고 싶어서? 설마. 그냥 튀고 싶어서? 그럴 리가. 미래의 신문을 만들고 싶어서? 시도 그림도 없지 않은가.

파격을 위해 콘텐츠를 전멸시킬 편집자는 없다. 파격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고 그날의 아이디어 역시 메시지가 주인공이었다. 무슨 메시지? 지면에는 날짜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달력? 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니다. 있다. 아니, 있었다.

<새 천년, 위대한 첫걸음.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 메시지가 이유였다. ‘백지 신문도 가능한데 뭘 못하겠습니까, 새 천년엔 뭐든 도전해보십시오’ 라고 독자를 향해 외친 파이팅이다. 지면의 중앙에 들어갔어야 할 이 제목이 전날 밤 수차례의 편집국 회의를 거치면서 빠져버렸다고 한다. ‘메시지’에 찍혀야 할 방점이 ‘파격’에 찍히면서 제목마저 희생되고 만 것이다. 지면을 기획했던 선배와 편집부 동료들은 ‘그래도 반은 성공했다’며 위안을 삼았지만, 기존의 아이디어대로 신문이 만들어졌다면 어땠을까, 지금도 가끔씩 생각한다.(3000년 1월 1일에 누군가 다시 시도할 것이라 기대한다면 너무 나간 걸까)

그나마 다행은 독자들이 ‘백지 1면’을 ‘독자를 위해 비워놓은 1면’으로 해석해 준 점이었다. 아이들이 그린 그림, 가족의 새해 소망, 새해 버킷 리스트 등으로 가득 채워진 ‘그들만의 1면’을 편집국에 보내온 독자들도 있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그분들이 보내온 지면은 장기영 사주가 말한 ‘미래의 신문’과 닮아 있었다.

 

#인디펜던트의 독립적이고 독보적인 파격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전 세계의 신문들은 재앙의 참상에 초점을 맞추었다. 검은 쓰나미가 바닷가 마을 주민들을 쓸어가는 장면이 방송을 탄 뒤에 신문이 보여줄 수 있는 사진은 한계가 있었지만 모두들 그렇게 만들었다. 재난 보도는 그래야 하니까, 그래왔으니까. 하지만 한 신문은 생각이 달랐다.

영국에 본사를 둔 이 신문사는 지진파와는 전혀 다른 충격파를 전 세계 편집자들에게 던졌다. 1면에서 재난 사진과 기사를 빼는 대신 일본을 상징하는 붉은 원 안에 <힘내라 일본, 힘내라 도호쿠>라는 제목을 적어넣었다. 2만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한 재난의 첫 보도를 ‘응원’으로 시작한 것이고, 그 파격으로 전달한 메시지는 ‘인류애’였다. 이날 인디펜던트의 지면은 수많았던 재난보도, 더 자극적인 사진과 더 충격적인 제목을 더 크게 실으려 했던 편집자들의 '임팩트 경쟁'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파격을 위해 뉴스를 죽일 것인가

편집자라면 누구나 ‘파격’에 대한 욕심이 있다. ‘백지 편집’도 해보고 싶고 ‘응원 편집’도 꿈꾼다. 앞서의 두 지면처럼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편집 아이디어로, 기사보다는 제목과 사진으로 승부하고 싶다. 제목이 시와 같고 사진이 그림 같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상상해보라. 그런 신문을 만들고 싶지 않은가(끄덕 끄덕). 하지만 아쉽게도, 모든 판타지가 그렇듯 편집자의 그것 역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아름답다. 콘크리트의 현실로 돌아와 다시 들여다보자.

‘힘내라 일본’이란 명작을 남긴 인디펜던트는 이전부터 파격으로 유명했다. 한국의 편집자들도 ‘이렇게 한번 해볼까’ 생각했다면 표절 의혹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인디펜던트의 과거 지면들을 검색해보는 편이 좋다. 장담컨대 그들이 이미 시도했을 가능성이 80% 이상은 되지 싶다. 그런데 2016년 3월 26일, ‘편집의 신문’이라던 그 인디펜던트가 더 이상 종이 신문을 만들지 않기로 했다. <Stop Press(인쇄 중단)>란 제목이 ‘마지막 지면’을 장식했다. 아이러니다. 더 이상 보여줄 파격이 없어서인가. 혹 변변찮은 기사를 편집으로 커버하다가 한계에 부딪친 건 아닌가. ‘아니야, 디지털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야’ 라고 변명하지만 자꾸만 의심이 간다.

반면 편집적 파격이 거의 없다시피 한(그래도 제목과 편집은 훌륭하다) 뉴욕타임스는 요즘 잘나가고 있다. 트럼프가 열심히 도와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끊임없이 뉴스를 이슈화하고 오피니언 리더들을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의 사옥 앞에서 <계속 보도하라: 인쇄할 가치가 있는 모든 뉴스>라고 적힌 피켓을 든 독자의 사진은 인디펜던트의 <인쇄 중단>지면과 함께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게 뉴스인가를 먼저 생각하자

지금껏 편집자들 사이에 ‘좋은 편집’으로 회자되는 지면들을 보노라면 ‘와~’ 하고 탄성이 절로 나오는 작품이 많지만, ‘이 제목을 위해 뉴스 가치를 죽여야 했나’ 싶은 지면들도 적잖이 있다. ‘임팩트’와 ‘재미’가 차지한 공간 주위로 뉴스의 혈흔이 가득하다. 2시간 동안의 피말리는 명승부가 생중계됐는데 다음날 아침 ‘우리가 졌지 말입니다’ 하고 보도한다면 어떻겠는가(이런 지면이 있었다는 건 아니다).

신문은 뉴스로 승부하는 매체다. 그러니 편집적 파격에도 뉴스가 실리는 게 맞다. 뉴스 아닌 메시지로 승부를 걸겠다면 적어도 “오늘 신문 봤어?” 독자들이 카톡으로 퍼나를 정도의 파괴력이 있어야 한다. 신선하지 않은 메시지에 신선한 파격과 임팩트를 제아무리 입힌다 한들 ‘그들만의 지면’으로 잊힐 뿐이다. 예측 가능한 이슈로 ‘재치 경쟁’을 하기보다는 독자의 궁금증을 하나라도 더 풀어주고, 그 핵심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지면을 만드는 게 낫다. 현실적으로 어렵고 당장은 효과가 보이지 않는다 해도 그렇게 하는 편이 장기적으로 이롭다.

생각은 이렇게 하지만 오늘 당장 변변찮은 기사 원고가 내 앞에 놓인다면, 기사를 줄이거나 죽이고 싶고, 엉뚱하지만 재미있는 제목을 떠올려보다가, 차라리 사진을 키우고 사진 제목을 헤드라인으로 올려버릴까 고민할 것이다. 그러다 마음을 고쳐먹고 관련된 모든 뉴스를 검색하고, 기어이 숨어있는 제목거리를 찾아내고, 기사에 넣고, 전면에 배치하고, 적확한 키워드를 제목으로 키우고, 그리하여 사회적 이슈를 만들어 내는, 그런 상상을 하며 네이버 검색창을 두드리고 있을 것이다. 아주 가끔은 상상이 현실이 되기도 한다는데 그런 행운은 왜 자꾸 비켜가는지.

이쯤 해서 ‘시와 그림으로 가득찬’ 미래의 신문을 다시 의심해 본다. 야근 탓인가. 졸린다 싶더니 갑자기 눈앞에 설원이 펼쳐진다. 까마득한 절벽, 나는 자일로 연결된 한 가닥 줄에 매달려 있다. 누군가 절벽 위에서 힘껏 줄을 쥐고 있다. “놓지 마세요” 나는 애원한다. “뉴스를 지켜” 독자임이 분명한 그의 말이 들린다. 그러고 보니 팽팽한 줄의 위쪽에도 누가 달려 있다. 알록달록한 패션으로 보아 ‘시와 그림’이다. 줄을 오르려니 다리가 잘려나가는 듯 아프다. 발에 묶인 줄 아래로 큰 덩치의 ‘뉴스’가 보인다. 독자의 힘으로 셋을 지탱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주머니에 넣어둔 칼이 떠오른다. 줄은 조금씩 조금씩 아래로 밀리고 있다. 나는 칼을 쥐고 비명을 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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