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9> AI와 윤전기 사이에서


 


- 미국의 한 대학 연구팀이 만든 ‘퀼(Quill)’이란 지능형 프로그램이 있어. 스포츠 경기에 관한 데이터를 입력하면 자동으로 기사를 작성하는데, 그게 말야 그냥 스트레이트 기사만이 아니라 감성적인 문장까지 구사하는 거야. 기자들이 쓴 기사보다 낫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니까. 근데 더 놀라운 건 그게 5년 전 상황이란 거야. 지금은 빅데이터와 연결돼 더 막강해졌지. 이미 포브스 등 많은 매체에서 ‘실전 배치’했고 30초당 한 건씩 기사를 만들어 올린대. 퀼이 기자들을 ‘킬(Kill)’하고 있는 거지.
- 기자들에겐 터미네이터네.
- 그런 셈이지. 근데 그 알고리즘을 신문 편집에 적용한다고 생각해봐. 편집국장의 음성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맞춤형 헤드라인을 내놓을 거야. 취향에 따라 고를 수도 있을 거고. 신문 편집자의 미래? 게임은 끝났다고 봐.
- 근데 형, 그거 너무 디지털적이지 않아요? 내 말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거지. 우리가 만드는 종이 신문은 만질 수 있고, 집어 넘길 수 있고, 잉크 냄새가 나고, 가끔은 오탈자도 있어서 사람 냄새도 나고, 그런 거잖아요. ‘디지털 퍼스트’ 라지만 아직도 수백만명의 국민들이 돈을 내고 신문을 보고 있구요. 현재를 미리 묻어버리는 게 미래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요.
- 어차피 방향은 정해져 있는 거니까. 신문도 그쪽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는 얘기야.
- 제목 하나를 달더라도 자부심이 있고 없고는 큰 차이에요. 저는요, 기자들이 신문에 대한 애정을 잃고 스스로 신문의 힘을 약화시키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돼요. 편집자들은 취재부서가 편집의 중요성을 모른다고, 기사만 쓰면 자판기처럼 ‘뚝딱’ 하고 신문이 나오는 걸로 안다고 얘기하잖아요. 그러는 자신들은 신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편집만 하면 ‘뚝딱’ 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닐까? 형, 디지털이나 알고리즘 같은 거 말고, 진짜 ‘신문 공장’엔 가봤어요?


#그래서 나는 부평공장에 갔다
후배의 질문에 답할 말이 없었다. 신문사 편집부에서 18년, 부끄럽게도 나는 윤전기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후배의 말대로 이건 애정의 문제였다. “사랑이 식었네”는 와이프가 항상 하는 말이고, 이쯤하면 “애초에 사랑 따윈 없었네”란 말을 들어도 싸다.
다음날 나는 조선일보 인쇄공장 중 가장 시설이 좋다는 인천 부평공장에 전화해(편집부 출신 선배가 사장님이라는 행운이) 다짜고짜 방문 약속을 잡았다. 야근하고 쉬는 평일 저녁(인쇄 장면을 봐야 하니까)이어야 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기어이, 나는 경인고속도로를 탔다.
 
#소음, 잉크냄새, 그리고 두루마리들
“귀마개를 하시죠.”
안내를 받아 들어간 윤전실, 진한 잉크냄새에 적응할 틈도 없이 공장장님이 핑크빛 물체 2개를 건넸다. 거대한 윤전기 4대가 동시에 돌아가며 내는 소음은 엄청났다. “아뇨, 설명도 들어야 해서요” “네?” “설명요, 설명.” 말할 때마다 배에 힘을 주고 크게 외쳐야 했다. “뭐라고요?” 아차, 공장장님은 이미 귀를 막은 상태였다. 손짓으로 사양하고 사장님 선배를 따라 견학 코스를 밟았다.
모든 것은 종이에서부터 시작됐다. 부평공장 지하 저장고엔 신문지면 4개를 동시에 찍을 수 있는 폭 1.5m의 두루마리 신문용지가 700개나 저장돼 있다. 거인이 ‘볼일’에 대비해 쌓아둔 화장지 창고 같다고나 할까. 하나를 꺼내 푼다면 길이는 20km, 무게는 1.4톤에 달한다. 이 무거운 걸 어떻게 꺼내느냐, 자동이다. 주차 타워의 자동차처럼 하나씩 기계장치에 의해 저장되고 꺼내진다. 밖으로 나온 두루마리를 윤전기까지 옮기고 장착하는 것도 컴퓨터가 알아서 한다. 창고와 윤전기 사이엔 두루마리 하나씩을 얹은 수송용 로봇 카트 수십 대가 늘어서 있는데, 용지가 필요한 윤전기까지 정확히 찾아가 종이를 갈아 끼우고 돌아온다. “저 카트 하나가 고급 벤츠 한 대 값이야” 선배가 말했다.
윤전기는 한 번에 용지 2개를 인쇄한다. 풀려지는 용지 뒤엔 여분의 두루마리 2개씩이 미리 대기하고 있다. 종이가 떨어지면 다른 두루마리가 그 자리에 들어가고, 비워진 하나의 두루마리는 로봇 카트가 와서 메워주는 식이다. 그렇게 4대의 윤전기를 위해 모두 8개의 두루마리가 동시에 풀리며 끊어지지 않고 종이가 공급되는 것이다.

#종이, 색다른 네 번의 키스를 받아야 신문이 될지니
캄캄한 창고에서 나와 두루마리의 족쇄까지 풀린 종이는 팽팽하게 기지개를 켠다. 그리고는 기다렸다는 듯 타워형 윤전기의 위쪽을 향해 비상한다. 처음 맞이한 건 파란색 잉크가 묻힌 롤러. 돌아가는 원통엔 서로 다른 지면을 담은 알루미늄 감광판 4개(용지엔 한번에 4개의 지면이 찍힌다 했던 걸 기억하길)가 감겨있다. 파랑과의 끈적한 키스(?)를 마치자마자 위쪽으로 빨강, 노랑, 검정의 롤러가 ‘나도 나도’ 하며 기다리고 있다. 각각의 롤러에 감긴 판의 모양은 같다, 색깔만 다를 뿐 (4색이 겹쳐 섞이며 칼라가 구현되는 원리, 칼라 지면 1장을 찍기 위해선 4장의 알루미늄 판이 필요하다는 말씀). 순식간에 16개(4x4)의 판을 거치며 솟구친 종이는 4개의

지면이 찍힌 신문이 된다. 이 공장에선 동시에 32개의 칼라 지면을 인쇄할 수 있다.


#종이와 기계의 향연, 그리고 땀방울
8줄의 종이가 동시에 위로 솟구치며 인쇄가 되고, 인쇄된 지면이 사방으로 흩어져 올라가면서 잘리고 나눠지고, 다시 한 곳으로 모여 접혀지며 신문의 형태를 갖춰 나오는 모습은 기계와 종이가 빚어내는 행위예술 같았다. 아름다웠다.
위쪽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있는데 공장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15명 남짓의 직원들이 여기저기서 방금 찍혀 나온 신문을 바닥에 깔아놓고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었다. “각자 맡은 지면들이 있어. 색깔이 제대로 나왔는지 얼룩이 묻은 지면은 없는지 모니터에서 1차, 지면에서 2차로 검사하는 거야. 인쇄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잘못된 부분을 찾아 미세 조정을 하지.” 선배는 이를 ‘검지’라고 불렀다.
공장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상황은 뭘까. “재강판”이란 답이 돌아왔다. 강판(편집 데이터 전송)을 하고 윤전기가 막 돌기 시작했는데 취재부에서 ‘기사에 오탈자가 있다’며 달려오고, 편집자가 ‘이건 고쳐야 돼’ 하며 기존 판을 취소하고 다시 강판을 하는 경우다. 편집국에선 간단한 작업이다. 하지만 공장에선 윤전기를 세우고 알루미늄 판을 바꾸고 다시 윤전기를 돌려야 한다. 고속으로 돌고 있는 윤전기는 자동차 브레이크 밟듯 ‘끼익’ 세울 수가 없다. 현장에선 “이륙한 비행기를 착륙시킨 후 다시 띄우는 것과 같다”고 한다. 세웠다 돌리는 과정에서 인쇄품질이 떨어지는 초반 지면은 폐기해야 하고, 서둘러 속도를 올리다 보면 윤전기 속에서 용지가 끊어지는 ‘지절’ 사고가 나기도 한다. 끊어진 용지가 롤러에 말려 들어가면 단단하게 굳어버리는데 그런 경우엔 종이 덩어리를 망치로 깨고 윤전기 전체를 청소해야 한다. 그 시간만큼 인쇄는 멈추고 발송과 배달도 늦어진다. 결국 오자 하나 때문에 종이가 끊어지고 구독이 끊어지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설명을 듣는 내내 가슴이 뜨끔했다. 그 재강판 단골 편집자가 접니다, 하고 하마터면 자백할 뻔했다.


#가서 느껴보라
‘신문에 미래가 있을까’ 불안하다면, ‘다른 일을 택해야 했는데’ 회의가 든다면, 자신이 만드는 신문이 인쇄되고 있는 공장을 한번 찾아가보길 바란다. 가서 종이의 아름다움과 가능성을, 인쇄의 무거움과 자신의 가벼움을 느껴보길 바란다. 그리하여 매일 보던 신문이 다르게 보이고 신문에 박힌 헤드라인이 실제보다 커 보인다면, 다시 편집국에 돌아와 더 새로운 표현과 더 적확한 단어를 고민해보길 바란다. ‘터미네이터’에 반격을 가할 ‘존 코너’의 이야기는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