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나재필의 Feel <25>


우리는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가. 아니면 정신병원에서 일하고 있는가. 의사소통 전문가 마르틴 베를레에 의하면 우린 분명히 정신병원에서 살고 있다. 이에 대한 준거는 다양하다. VIP 주차공간에 차를 댔다고 견인 당한 직장인, 계부의 죽음은 규정에 없다며 휴가를 주지 않은 기업, 직원 부고를 ‘복사+붙여넣기’하는 인사팀, 소통을 늘리겠다며 직원의 개인 공간과 사무실 간 벽을 없앤 회사, 경영이 어렵다며 직원 월급은 깎으면서 임원들에게는 성과급을 몰아주는 기업 등이다.
물론 정신병원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없다. 밥통(생계)이 걸렸는데 누군들 쉽사리 밥그릇을 걷어차겠는가. 직원들 고생한다고 은밀하게 ‘섹스 파티’를 열어줬다는 해외토픽 같은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정신병원이라고 칭하는 직장엔 세 종족이 산다. 처세와 허세와 실세…. 처세는 소통이다. 홀로서기가 아니라 다함께 가는 것이다. 처세에 능한 사람은 교만하지 않고 부지런하다. 타인의 감정 선을 건드리지 않고 유연하게 간다. 할 수 없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니 울화통 터질 일이 없다. 반대로 허세 부리는 종족은 여럿이 가려 하지 않고 독불장군처럼 혼자서 간다. 자신들은 ‘무쏘의 뿔’이라고 에둘러 변명하겠지만 그냥 ‘개뿔’일 뿐이다. 이들은 잇속엔 밝은데 남의 처지는 봐주지 않는다. 누군가가 자신의 삶 속에 끼어들까 봐 속물근성으로 그득하다. 그래서 일단 무엇이든 일이 생기면 완강히 거부부터 한다. 때문에 소소한 사건에도 편견과 오해, 독선과 음모가 늪처럼 숨어있다. 이름하여 ‘스웨그(swag?허세를 부리고 거만한 포즈를 취하는 것)’다. 내가 먹는 음식이 항상 맛있는 까닭은 내가 선택한 것은 무조건 옳다는 의식 때문이다. 심리적 손해를 보기 싫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실세’는 어떤가. 대부분의 실세는 힘들어도 말하지 못하고 괴로워도 그냥 참는다. 처세도 잘하고 허세도 없지만 마음이 황망하고 쓸쓸하다. 그래서 실세(實勢)가 되었다가도 한방에 실세(失勢)가 될 수도 있다.
직장이라는 ‘정신병원’은 아픈 사람들의 ‘집’이다. 혼(魂)이 없는 하얀 집이 아니라, 혼(魂)을 채우는 인간의 집이다. 회색 벽, 붉은 피, 초록색 가운, 메탈 색(metal?金屬) 콘텐츠는 육신을 난도 하는 곳이 아니라 따뜻한 정신을 뒷갈망하는 곳이다. 때문에 직장(병원)은 ‘사람다워야’ 하고 사람을 닮아야 한다.
‘미쳤어, 이게 뭐야, 못 참겠어, 지겨워, 안 돼, 못해…’가 입버릇이 되면, 그 입방정은 결국 현실이 된다. 그래서 뒷모습이 중요하다고 했다. 자신의 뒷모습은 자신에게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의식할 수 없기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래서 얼굴이나 말로는 속일 수 있어도 뒷모습으로는 속일 수 없다. 내가 볼 수 없는 것은 벌컥 화를 낸 순간의 자신의 얼굴, 잠자는 얼굴, 그리고 죽었을 때의 얼굴이다. 지금 옆 사람을 보라. 그리고 그의 뒷모습을 보라.
좀 더 ‘내려놓을 것’을 권면한다. ‘언젠가 달라질 거야’라는 말은 결국 달라지지 않겠다는 뜻이다. 언젠가 해보겠다는 것은 결국 할 수 없다는 얘기다.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 당장’이 중요하다. 실패하고 또 실패하고 다시 실패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잘’ 실패해야 한다. 우린 희망을 기다리면서도 희망이 도착하기도 전에 지쳐버린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도망이 아니라 더 가까이 가서 두려움을 꼭 껴안는 것이다.
붉은색만 해도 ‘불그죽죽하다’ ‘불그스름하다’ 같이 56가지 표현이 있고, 검은색 표현도 69가지나 된다. 하물며 사람의 색깔이란 그 얼마나 많을 것인가. 1000명이면 1000명, 1만 명이면 1만개의 빛깔이 있을 것이다. 색깔은 곧 생각이다. 모든 감정에 굳은살이 박히고 나면 늦다. 실세든 허세든 처세든 일단 사람과의 관계를 잘해야 한다. 인간관계는 저속하다. 관계가 끝나면 그 시작이 어땠는지 되돌아보지도 않는다. 관계의 시작에서 끝을 생각하지 않듯 사람들은 아무런 준비운동 없이 서로를 온전히 받아들이다가, 또다시 상처받을 준비를 끝낸다.
‘직장’을 ‘정신병원’이라고 생각하는 당신은, 이미 정신병원에서 거주하고 있다. 이 남루한 현실은 무어란 말인가.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킨 당사자도 바로 자신이다. 정답은 없다. ‘바빠 죽겠다’는 말을 달고 살면 진짜 ‘바빠서’ 죽어난다. ‘나는 회사와 결혼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내와 이혼할 확률이 높다. ‘나는 정신병원에서 일한다’고 투덜대는 사람은 또 다른 정신병원으로 갈 가능성이 크다. ‘직장’이라 쓰고 ‘정신병원’이라 읽을 게 아니라, 정신병원이라고 쓰고 직장이라고 읽어야 맘이 가볍다.
톨스토이가 남긴 마지막 말의 궁극적 해석은 ‘미치거나 살아남거나’다. “그래. 이것이 끝이어도 상관없다. 인생, 별것도 아니로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