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나재필의 Feel <23>


지천명(知天命)은 하늘의 뜻과 명(命)을 아는 나이다. 늙어가는 과정이 아니라, 늙음을 대비하는 창조의 나이이기도하다. 천명이 다하도록 봄여름가을겨울의 혹독한 시련을 거쳤으니, 나이 오십은 조련이 불필요한 ‘봄’의 나이테다. 때문에 이때의 위치는 제 몸의 사용설명서를 다시 들여다보고 육신의 가치를 최적화시키는 중요한 시기다. 이는 얼마나 오래 살(버틸) 것인가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늙어갈(새롭게 태어날) 것인가를 통섭하는 문제다. 곱게 늙는 것도, 청년의 꿈을 다시 갖는 것도, 사랑과 열정을 부유하는 것도 바로 50세의 기로다. 때문에 오십은 사십대의 졸업이 아닌, 삶의 궤적을 통째로 버무려 통찰력과 지혜라는 ‘잉걸불’을 만들어 내는 또 다른 출발이다.
그렇다면 백년의 역사, 신문은 어떠한가. 독하게 얘기하면 죽어가고 있거나, 살아있음을 억지로 증명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근근이 연명 중이다. 편집은 어떠한가. 편집 또한 죽어가고 있거나, 살려고 발버둥치거나, 도태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중이다. 예컨대 소수의 포털이 옐로저널리즘이라는 얼굴을 감추고 페이퍼를 공격하고 있는 것도 같은 양상이다. ‘인기 연예인 ○○○, 방 안에서 숨 쉰 채 발견되다’라는 표제가 탄생한 것은 기형(畸形)이자 노략질이다. 처음엔 이런 낚시질에 독자들이 걸려들지 않았지만 이젠 이런 입질이 없으면 낚이지 않는다. ‘여자를 춥게 만들어라(벗겨라)’라는 디지털 아마추어리즘에 언제까지 당할 것인가.
이제 좋은 콘텐츠만 있으면 알아서 팔린다는 도그마는 유효하지 않다. 더구나 그레이트 로테이션(Great Rotation)으로 불리는 뉴스시장의 변화는 약육강식의 틀을 깨고 있다. 구텐베르크 시대 유물인 인쇄매체들이 속수무책으로 스러져가고 있는 것이 어디 어제오늘의 일이던가. 영원?영속할 것만 같았던 스포츠신문들이 줄줄이 짐을 쌌고 ‘공짜면 다 된다’던 무가지(無價紙)도 달랑 ‘하나’만 남았다.
젊은층 10명 중 7명은 페이퍼 신문을 보지 않는다. 7년 사이 반 토막이 났다. 이런 판국이니 종이신문이 10년 이내에 없어질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호주의 미래학자 로스 도슨은 세계 52개국 종이신문에 대해 연도별 사망선고를 내리며 한국의 신문은 2026년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창립 50주년을 맞은 한국편집기자협회가 ‘미디어의 Digital Transition과 Future Journalism’라는 주제로 국제컨퍼런스를 연 것도 이러한 신문?편집의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보자는 의미였다. 붉은 피 낭자한 기존시장(레드 오션)에서 새로운 세계에 눈을 돌리기만 하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오만방자한 블루오션에 대한 자성이기도 하다. 지금 같은 종이신문 플랫폼으로는 생존하기 힘들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미디어환경 변화에 맞춰 체질 개선을 하라는 주문이다. 이는 현직 기자들의 생존문제와도 직결된다.
‘좋은’ 기사를 쓰고 ‘좋은’ 편집을 하면 독자가 알아서 찾아봐줄 것이라는 ‘생산자’ 중심의 마인드가 얼마나 순진한 것인지, 얼마나 위험한지를 깨쳐야한다. 오퍼레이터 조판에서 기자 조판으로 넘어갈 때 얼마나 분노했는가. 1인1판제에서 1인 다작(多作)으로 넘어갈 때 이 또한 얼마나 분노했는가. 앞으로 에디터 퍼스트에서 디지털 퍼스트로 넘어가는 이 시대 정서엔 또 얼마나 분노할 것인가.
미디어 환경은 너무 변했다. 어쩌면 인정하는 것이 이기는 길이 될 것이다. 생존할 수 없다면 바꿔야한다. 실패하지 않으려면 실패해봐야 하는 것처럼, 과다(過多)의 세상에서는 ‘모어(more)’의 전략도 필요하다.
언제나 미완성, 불완전인 것이 미디어환경이다. 미완의 여로, 생존의 징표, 신문과 편집의 생과 몰이 두렵도록, 몰아치고 있다. 절대적 자기긍정이 없으면 인간은 쉬이 비굴해진다. 비굴하지도, 오만하지도 않기 위해서는 자기부정과 긍정이 모두 필요하다.
언제까지 디지털과 에디터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할 수는 없다. 언제까지 ‘편집이 최고이고, 편집기자가 최고’라는 두터운 외투를 입고 버틸 수는 없다. 때로는 버리는 것이 이기는 것이이고, 비우는 것이 채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편집(編輯)’을 지키는 것은 ‘편집(偏執)’을 버리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받아들이는 것이 곧 지키는 일이다.
지천명이 되도록 편집기자들 최후의 보루(堡壘)로서 이 땅의 에디터세계를 이끌어온 한국편집기자협회에 경의를 표한다. 더불어 다가올 오십년도, 최전선에 서서 편집의 가치, 신문의 가치를 밝혀줄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