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나재필의 Feel <22>

“소년인 나는 아버지의 쓰라린 위장을 위해 냄비를 들고 시장에 가서 해장국을 사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겨울 새벽, 해장국집 문지방에 낀 얼음 위에 자빠져 끓는 국물을 뒤집어쓰고 허벅지에 화상을 입었다. 춥고 어두운 새벽 거리에서 울었다. 나는 이 세월과 내 아버지의 생애를 뛰어넘는 자가 돼야겠다며 울었다…. 한때 병석에 누운 아버지의 구술을 받아서 무협지 원고를 대필한 적이 있는데 그것이 내 문장 공부의 입문이었다.”
김 훈(金薰)은 당대 최고의 글쟁이다. 육(肉)에서 살을 발라낸 언어는 간결성, 압축성을 띠며 종이 위에서 명문장으로 탄생한다. 수사학적 문장, 형용사와 부사가 없는 글, 주어 동사의 뼈다귀만으로 된 동편제 같은 글, 조사(助詞)의 매개 없이 단어와 단어가 충돌해 전압을 발생시키는 언어를 쓰는 것이다.
생뚱맞게 김훈 얘기를 꺼낸 건 그의 글이 두렵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의 글이 부럽기 때문이다. 편집을 하면서, 종종 생각했다. 살을 발라낸 뼈의 편집, 군더더기를 뺀 수사(修辭)의 편집을. 그러나 번번이 실패했다. 편집은 하면 할수록 두려워졌고, 빼면 뺄수록 덕지덕지 군살이 붙었다. 그때마다 김훈의 문장이 울렸다. 누군가의 편집이 부러운 것은 다행이지만 두려운 것은 위기다.
글쟁이로 입신을 이룬 김훈은 신문쟁이로서는 양명(揚名)했으나, 직장인으로서는 낙명(落名)했다고 본다. 그는 순전히 먹고살기 위해 기자가 됐고, 삼십 년 동안 회사를 일곱 번이나 옮겨 다녔다. 그러면서 밥벌이의 그리움, 밥벌이의 위대함, 그리고 밥벌이의 지겨움을 느꼈다. 물론 데스크(desk)로서도 특별한 공력은 나오지 않았다. 당근과 채찍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해 ‘김국’이란 별칭으로 불렸을 뿐이다. 당시, 용감한 사람은 저항하면서 감방으로 갔지만, 그는 스스로 투항한 채 직장에 남기도 했다.

지금 이 시대, 데스크와 편집기자는 어디에 서 있는가. 저항하고 있는가. 투항하고 있는가. 저항과 투항은 한 치의 ‘벼름’도 없이 분화하고 진화하면서 조직의 방향성에 대해 묻고 있다. 저항하는 편집기자, 투항하는 데스크는 시대의 조류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불편부당함에 대해 ‘저항’한다기보다는 인기영합주의에 얹혀 맞선다는 점이다. 마치 반대를 위한 반대, 반기를 위한 반기를 든다. 이는 종장엔 편집의 투항이자 백기다. 데스크와 기자 사이에는 냉기류가 흐른다. 시베리아 전선의 저기압이 맹렬히 남진해 머리 정수리의 혈압을 올린다. 이 오묘한 전선대는 일 년 내내 소멸되지 않는다. 때로는 비도 쏟고 폭설도 쏟는다. 이런 토사물들은 서로를 지극히 경계한 채 퇴적한다. 만약 편집부 대기가 불안정하면 대류성 구름이 발생하고 심하면 소나기, 뇌우를 동반한다.
편집부의 저기압은 바로 무거운 침묵과 가벼운 역정(逆情)에서 비롯된다. 저기압이 오면 흐리고 눈비가 잦다. 이름 하여 ‘고혈압’이다. 이 병은 폭음으로도 낫지 않는다. 사사건건 핑계를 대고, 파당을 만들고 말끝마다 토를 다는 행위는 낭비다. 소모전이다. 예전엔 앞에서 저항하는 자가 뒤에서 승복하는 자보다 아름다웠지만, 이젠 뒤에서 저항하고 앞에서 승복하는 자가 아름답다. 진실 되기 때문이다.

데스크가 불편한가, 아니면 데스크가 불만인가. ‘토씨’ 하나 안 고치고 그대로 던져주는 데스크를 보면 능력이 없어 보이는가, 아니면 ‘토’를 달고 싶은가. 저자는 내 적의 편인가, 아닌가. 저자는 내 편인 것 같지는 않은데, 아마도 나의 편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서로가 몰라주니 이름 하여 ‘시댁’이다.
데스크도 사람이다. 편집기자도 사람이다. 모두 먹고살기 위해 밥벌이의 그리움, 밥벌이의 위대함, 밥벌이의 지겨움을 느끼며 살고 있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 일을 하는데 바락바락 생청을 쓸 필요가 없다. 사람 등 뒤에서 저격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일할 땐 계급장을 붙이고, 사적일 때는 계급장을 떼는 게 좋다. 데스크와 기자가 ‘총질’을 하면 양쪽 모두 리스크를 입는다. ‘밥벌이의 지겨움’을 달래고 나누고 달관할 때 좋은 편집도 나온다. 그 존재의 무게감이 지면에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데스크는 기자를 믿는다. 데스크도 기자였었다. 실력과 능력의 대척점에서 어떤 데스크가 될지 ‘막기자’ 때부터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야하지만, 최고가 되지 못해도 최선을 다해야한다. 신문이 죽고, 편집이 죽고 있다는 파멸적 치욕과 조롱은 ‘엄살’이 아니라 ‘엄포’다. 곁다리로 구경이나 하면서 분노하고 비토하는 건 비겁하다. 자기희생은 전혀 하지 않고 자기 챙기기에만 급급하다면 당장 짐을 싸서 떠나라.
감히 말하건대 편집은 인성(人性)으로 하는 것이다. 그 인성은 ‘함께’ 나아가는 진정성을 의미한다. 혼자서 ‘위작(僞作)’을 만들 수는 있지만 ‘작품’을 만들 수는 없다. 그 편집의 가치는 시대가 바뀌어도 절대 변하지 않는다. 언제까지 들러리로 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