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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등반과 편집
    작성자 대표 관리자 (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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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21-07-06 15:4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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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117

    # 2015년 1월1일 새해맞이 등반 


    검은 새벽. 야근을 마치고 잠시 집에 들렀다가 배낭을 걸러 메고 다시 검은 새벽으로 나섭니다. 설렘을 안고 새해 마중하러 북한산 백운대로. 뺨을 에는 영하 10도. 거기다 힘센 산바람이 가세하니 추위는 예상을 훌쩍 넘습니다. 인생사 예상대로 척척 맞아떨어진다면 무에 어렵겠습니까.

    예상이라는 화살은 대부분 기대와 달리 과녁을 어긋나기 마련입니다. 그걸 알기에 마음을 다잡습니다. 설렘이 긴장으로 옷을 갈아입습니다. 말없이 걷는 나와, 말없이 나를 지켜보는 어둠, 그리고 계곡물도 꽁꽁 얼어 말이 없습니다. 그렇게 말없이 뚜벅뚜벅 새해를 마중하러 갑니다. 계곡물은 얼어붙었지만, 내 가슴골 계곡은 땀으로 강을 만들 기세입니다. 가쁜 숨도 달랠 겸, 목도 축일 겸 걸음을 멈춥니다.

    하지만 예상이라는 화살은 기대를 또 빗나 갑니다. 물병이 그만 꽁꽁 얼었습니다. 꽁꽁 언 물병을 말없이 바라봅니다. 다행히 대안이 있습니다. 컵라면을 먹기 위해 준비한 보온병이 있거든요. 따뜻한 물로 목을 축이고 나니 한결 발걸음이 가벼워집니다. 긴장이 다시 설렘으로 바뀝니다. 설렘은 마술을 부릴 줄 압니다. 힘든 일도 단숨에 해치우고, 힘든 길도 깃털처럼 날아가게 합니다. 

    드디어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는 백운대. 새해가 얼굴을 보여주실 07시 47분보다 20분 먼저 도착했습니다. 다행입니다. 저 멀리 어둠이 걷히고 있습니다. 여명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함박미소가 걸립니다. 잘 왔다고, 고생했다고 내 몸을 기특해하며 두 팔로 안아 줍니다. 

    하지만 함박미소도 잠시입니다. 정상의 추위와 거센 바람은 금세 내 몸과 함박미소까지 계곡물처럼, 물병처럼 꽁꽁 얼리기 시작합니다. 셀카를 찍기 위해 장갑에서 손을 빼니, 몇 초도 안 돼 꽁꽁 얼어버립니다. 등산화도 꽁꽁 얼어 열 개의 발가락이 얼음 신발 속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기다린 임을 향한, 임을 위한 20시간 같은 20분의 기다림. 여기저기서 탄성이 들립니다. 고개를 들었습니다. 붉디붉은 새해가, 용광로보다 더 붉은 새해가, 내 심장을 흐르는 붉은 피보다 더 붉은 새해가, 내 눈 속으로 들어오시는 겁니다. 어찌 저리 붉나요, 어찌 저리 아름답나요, 어찌 저리 황홀한가요. 눈이 촉촉해집니다. 오길 잘했구나 참 잘했구나. 이렇게 그해 새해를 맞았습니다. 


     # 2021년 6월, 돌아본 편집 


    편집도 새해맞이 등반과 비슷합니다. 예상이라는 화살은 대부분 기대와 달리, 과녁을 어긋나기 일쑤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경쟁지를 꼼꼼히 살피고, 오늘의 뉴스를 인터넷으로 챙겨보고, 새해맞이 같은 출근을 할 땐 기세등등합니다. 하지만 하얀 사각의 백지라는 링에 막상 오르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시간에 쫓기다 보면 머리는 꽁꽁 얼어버리고, 차별화된 뭔가를, 임팩트 있는 뭔가를 제목과 레이아웃에 담겠다는 다짐은 마비가 됩니다. 그 와중에 기사계획이 바뀌고, 다시 레이아웃하고, 다시 제목 달고, 초판에 부족한 제목과 레이아웃을 다음 판에 만회하려고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럴 때면 나와 시지프스가 오버랩 됩니다. 이런 날은 술 한잔 하며 자신을 위로합니다. “편집엔 제목엔 답이 없다잖아”를 무한 독백하며. 그래도 다음날 다시 마음을 다잡습니다. “아니야 편집엔 제목엔 답이 있을 거야”라는 주문을 외우면서 말이지요. 

    이러하기를 무한 반복하던 어느 날. 외국 신문을 보다 만세를 외쳤습니다. 그간 외국 신문을 꾸준히 봐왔지만, 대부분 레이아웃과 그래픽 아이디어를 얻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제목만 비교분석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 더타임스 더가디언, 일본의 요미우리 아사히, 프랑스의 르몽드 르피가로,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호주 등 해외 유명 신문을 구글 번역기로 번역해가며 보았습니다.

    그런데 내로라하는 신문들 제목이 배울 점은 고사하고, 말도 안 되게 재미도 없고, 말도 안 되게 울림도 없고, 말도 안 되게 임팩트도 없었습니다. 그저 기사를 요약한 제목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문패성 제목이 메인 제목으로 달리고, 1면 제목이 뒷면 점프기사 메인 제목에 그대로 올라가고, 메인 제목만 보면 무슨 말인지 모를 칼럼 같은 제목이 뉴스면 톱제목으로 떡하니 인쇄돼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왜 만세를 불렀냐고요? 우리나라 신문 제목들이 대단해서요, 우리 편집기자들의 능력이 대단해서요, K편집이 정말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신문 편집은 신문 제목은 대한민국이 빅리그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아시다시피 한국의 편집부는 세계 유일의 신문 조직입니다. 제목 달고 레이이웃하고 기사와 사진 취사 선택하고, 기사 첨삭하고, 기사 지면배치 권한까지 있는 그런 기자는 대한민국 편집기자뿐입니다. 그래서 편집부 기자를 제대로 영어로 번역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편집의 길이고, 제목의 길이었습니다 .

    오늘도 머리를 쥐어짜실 편집 선후배 여러분. 여러분 하나하나가 편집의 답이고 길입니다.

    여러분이 메시이고 호날두입니다. 여러분이 편집 백운대이고 정상입니다.

    중앙일보 임윤규 차장


     P.S. : 얼마 전 드문드문 써 둔 일기장 같은 카카오스토리를 들춰봤습니다.

     2015년에 새해맞이를 하러 북한산에 올랐었네요. 

    처음 해본 새해맞이 혼등 글을 읽다 보니 등반과 편집이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쓴 등반 글과 지금의 편집에 대한 생각을 오버랩시켜 정리해 봤습니다.

    첨부파일 임윤규의 편집단상.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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