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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안덕기 조선일보 디지털 총괄에디터 인터뷰
    작성자 대표 관리자 (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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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20-07-08 09: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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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574

    안덕기 조선일보 디지털 총괄에디터 / 인터뷰


     

    안덕기 조선일보 디지털 총괄에디터는 “편집이 취재에 말발이 먹히려면 절반의 승률로 부족하다.

    5대 5를 넘어 7대 3, 8대 2는 돼야 취재가 귀 기울여 듣는다”고 강조했다.  



    “편집부장은 자전거 바퀴의 허브다.”
    안덕기 조선일보 디지털 총괄에디터(부국장)는 편집부장을 이렇게 정의했다. 바큇살을 하나하나 잇는 허브가 성치 않으면 신문사 바퀴는 제대로 굴러가지 못한다. 안 부국장은 조선일보 편집부장으로서 9년, ‘지면 허브’의 임무를 내려놓고 지난 3월 디지털 총괄에디터를 맡았다. 편집부장을 하는 내내 “힘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온전히 내 일에만 몰두할 수 있어서 “매력적인 직업”이라고 했다. 그래서 다시 시작해도 편집의 길을 걷겠다고 말했다.
    협회는 지난 5월 11일 안덕기 전 편집부장을 만났다. 편집 고수가 지난 30년간 체득한 탄탄한 기본기와 그만의 비기가 쏟아졌다.


    -조선일보 편집 데스크를 9년간 맡았다. 디지털 부서로 옮긴 지 두 달가량 됐다. 지난 9년을 돌아본 소회는.
    “처음 편집부장을 맡은 게 2011년 2월이었다. 그 당시 한 부국장이 저녁 술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안 부장, 니는 편집부장 4, 5년은 해야 할 끼다”라고 했다. 부산 사투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대답했다. “누구 죽일 일 있습니까. 4, 5년이나 하게요” 해보니 진짜 힘들다. 편집부장이라는 자리는 자전거의 허브 같다. 바퀴살을 일일이 잡아주는 중심이다. 모든 취재부서와 접촉을 해야 하고 광고국, 판매국, 사업단 등 편집국 외 조직과도 의견을 조율해야 한다. 여기서 헤매면 바로 신문이 흔들린다. 편집부장 초기에 페이스 조절을 못 했다. 죽을 것 같았다. 3년 3개월가량 지나고 도저히 몸이 감당이 안 됐다. 그래서 1년 정도 인터넷 부서에 있었다. 그러다가 컴백 제안을 받고, 다시 편집부장을 맡았다. 중간 공백을 제외하고 실질적으로 8년 정도 했다. 회사에서 이런저런 배려를 해 주고, 후배들도 많이 도와줘서 무사히 올 수 있었다.”


    -편집이 나의 업이라고 느낀 건 언제였나. 다시 시작해도 편집 일을 할 생각인가.
    “편집이 뭔지 모르고 들어왔는데 해보니까 재미있었다. 중간에 약간 방황했지만, 편집기자는 장점이 참 많다. 내가 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이만큼 좋은 직업이 없다. 취재기자는 사람들을 두루두루 만나는 일이, 영향력이 되고 인맥이 되는 장점이 있다. 그렇지 않은 성격의 소유자는 사람 만나는 일이 스트레스다. 언론사 사정이 어려워지고 있는데, 편집기자는 어디 가서 아쉬운 소리를 안 해도 된다. 자존심 세워가면서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이 많지 않다. 또한 대면 직업도 아니다. 은행원이든 공무원이든 대면 업무는 피곤한 일이다. 지나고 보니까 편집기자라는 게 아주 괜찮은 직업이다. 다시 하라고 하면 그러겠다.”


    -사진 보는 안목은 어떻게 키울 수 있나.
    “편집기자는 기본적으로 사진을 많이 다룬다. 처음에는 사진을 잘 몰랐다. 1, 2년 차쯤 됐을 때 어느 광고를 봤다. 후지필름이 충무로에 있었는데, 무료 사진 강의를 한다고 했다. 자기네 필름을 많이 사 쓰라는 의도였다. 한 달 동안 카메라 교육을 받고 사진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내가 편집자를 판단하는 방법의 하나인데, 그 사람이 사진을 어떻게 쓰는지 지켜본다. 이 사람이 뉴스를 제대로 알고 있는지 판단할 수 있다. 또 시각적 효과도 중요한데 사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지면이 완전히 달라진다. 강의 수료 이후에는 사진전이나 미술관을 자주 찾았다. 작품을 보면서 새로운 인사이트가 생기고, 색의 개념에 대한 힌트도 얻을 수 있었다.”


    -그동안 편집 일을 하면서 가장 힘에 벅찼던 순간은 언제였나
    “편집부장 하는 내내 힘에 벅찼다. 물론 신문사 편집국장이 기본 결정을 하지만, 강판 직전 모든 책임은 편집부장이 진다. 지면에 대한 최종 책임은 편집부장에게 있다. 그게 늘 짐이었다. 제일 힘들었던 순간은 부장을 처음 맡은 지 3년 3개월 지났을 때다. 너무 힘들었다. 당시 오버페이스 했다. 이러다간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요일에 산책을 갔는데 함께 간 와이프 걸음을 못 따라갔다. 숨이 가빴다. 그날 밤 와이프에게 그만해야겠다는 얘기를 했다. 편집부장이라는 자리도 권력이라면 권력인데, 그걸 내려놓는 게 쉽지 않고, 가족에게 얘기하는 것은 더더욱 힘들었다. 와이프는 “당신이 정 그렇게 힘들면 그만해”라고 말해줬다. 너무 고마웠다. 그때 “무슨 소리야”라고 반응했다면 그냥 더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난 다음 날 일어났더니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병실을 마련해서 입원했는데 눕자마자 환자가 돼 버렸다. 팽팽한 긴장 상태에 있다가 마음을 내려놓는 순간 바로 환자가 됐다. 내가 갖고 있던 뭔가를 내려놓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때 놓지 않았으면 크게 탈이 났을 테고, 지나고 보니까 그날 선택을 잘한 것 같다.”



     제12회 한국편집상을 받은 2006년 2월 23일자 지면. 성폭행 당한 뒤 살해된 용산 초등생의 장례식 스케치를 다뤘다.

    뉴스가 가져온 파장으로 2월 22일은 ‘아동 성폭력 추방의 날’로 지정됐다.


    -그렇다면 일하면서 가장 가슴에 벅찼던 순간은 언제였나.
    “제일 기억에 남는 일은 처음 한국편집상을 받았을 때다. 2006년이다. 당시 사회면을 맡고 있었다. 사회면 톱 거리가 없는 어느 일요일이었다. 사회부장도 종일 고민이 많았다. 그러다 저녁에 연합뉴스에 단신이 하나 나왔다. 용산의 한 초등생이 파주 논에서 발견됐다는 뉴스였다. 그때가 2월, 추수가 끝난 휑한 논에서 소녀의 시신이 발견됐다. 김민배 당시 사회부장이 부원들에게 용산으로 그리고 파주로 얼른 가보라고 취재 지시를 했다. 가서 보니까 성폭행을 당한 흔적이 있는 시신이었다. 시신을 유기한 사람이 용산에 위치한 철물점 주인이었고, 함께 가담한 사람이 그의 아들이었다. 희한한 사건이었다. 그 뉴스를 사회면 톱으로 대문짝만하게 처리했다. 다른 신문들은 1단 정도 작게 처리했다. 그러고 나서 다음 날부터 3일 연속 1면 톱으로 아동 성폭력 기사를 실었다. 우리나라는 당시만 해도 아동 성폭력에 대해 법원 판결이 관대했다. 웬만하면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성폭행이 아니고 성추행 같은 경우엔 다 풀려났다.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은 국회에 산더미처럼 쌓여만 있었다. 다음날부터 이슈가 되고 방송까지 난리가 났다. 그때 상을 받은 지면은 소녀의 장례식 스케치 기사였다. 사회 1, 2면 양면에 걸쳐 처리했다. 소녀의 장례식 날이 2월 22일이었는데, 여성가족부에서 그 날을 아동 성폭력 추방의 날로 지정했다. 2월 22일은 잊지 못하는 날이다.”

     

    -안덕기의 편집 철학과 편집 노하우를 말해 달라.
    “기자들은 기본적으로 ‘초치고’ 싶은 욕망이 있다. 취재기자들도 상황을 윤색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취재기자가 초를 한 번 치고, 편집자가 한 번 더 초를 친다. 이렇게 되면 신문에 나오는 결과는 실제보다 오버된다. 그것은 내가 만드는 지면이 돋보이게 하고 싶은 기본적인 욕망 때문이다. 처음에는 나도 그랬다. 그러다가 어느 날 책임 있는 자리에 있다 보니 ‘이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들에게 “초치지 마라. 딱 있는 그 상태까지만” 담으라고 당부한다. 내 마음속에는 기사 상태를 표현하는 단계가 많이 있다. 열 단계 정도가 마음속에 있다. ‘이 정도 상황이면 제목은 여기까지’라는 판단 지표다. 그런데 편집기자들은 5단계 상황이면 보통 8단계 정도로 초를 치고 싶어 한다. 초를 빼고 제목을 잘 다는 것은 정말 어렵다. 초를 치면 쉬워진다. 편한 길이지만 가야 할 길은 아니다. 첫 번째 철학을 꼽으면 ‘초치지 마라’. 여기에 힌트를 준 사람이 김대중 당시 주필이다. 부장을 맡은 지 첫해다. 1면 톱에 무슨 ‘대란(大亂)’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김 주필이 전화해서 “이 상황을 대란이라고 하면 더 큰 상황이 오면 뭐라고 할 것인가”라고 말했다. 아차 싶었다. 하지만 그 마음을 갖고 있어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최근에도 ‘마스크 대란’이란 제목을 쉽게 쓴다. 그렇지만 대공황 이후 우리가 겪고 있는 지금의 심각한 사태를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편집기자는 절제하면서도 정곡을 찌를 수 있으면 최고인데, 그게 힘들다.
    또 하나는 ‘논리에서 벗어나면 곤란하다’. 논리적으로 기사를 보면 좋겠다. 논리적이되 감성을 잃지 않는 편집자가 되면 좋겠다. 제목을 달 때 두 부류의 기자가 있다. 먼저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편집자가 있다. 제목을 수학 공식 다루 듯 한다. 그러면 틀리지는 않는데 재미는 없다. 또 다른 부류는 모든 기사를 감성적으로 접근하는 사람이다. 제목은 재미있는데 오버하기 쉽다. 붕 뜨게 된다. 둘 사이에서 접점을 찾는 게 어렵다. 논리를 갖추면서도 기사가 얘기하는 메시지를 감성적으로 던질 수 있다면 최고의 편집기자다.”


    -조선일보 사이다 제목이 그렇게 나오는 것인가. 원칙 말고 다른 비결이 있나.
    “편집 선배들 외에도 편집에 대한 메시지를 던져 준 취재 선배들이 많았다. 편집부 선배로는 인보길 선배가 있다. 편집부장이 된 이후 노보에 기고를 한 적이 있다. ‘인보길 선배의 발밑 만이라도 따라갔으면 좋겠다’라고 썼다. 인 선배는 편집국장을 두 번에 걸쳐 3년 정도 했다. 내가 조선일보로 옮긴 초기, 인보길 선배가 국장을 지냈던 3년치 지면은 1면부터 끝면까지 다 봤다. 보면서 지면을 핸들링 하는 요령을 배웠다. 큰 상황이 터지면 1면부터 여러 면을 펼친다. 그때 배운 게 1면을 이렇게 치면 3면에서 어떻게 받고, 4면은 어떤 스케치로 가고…. 지면의 큰 흐름과 리듬을 요리하는 법을 배웠다. 그 다음은 김대중 전 주필. 주필을 8년 정도 했는데, 김대중 주필 시절의 조선일보 사설 제목은 최고였다. 김 주필은 복잡다단한 상황을 아주 짧게, 콤팩트하게, 한마디로 딱 때린다. 김 주필의 사설 제목은 압권이었다. 제목은 짧을수록 좋다. 눈 코 입 귀 팔 몸, 모두 중요한 신체 부위다. 세종대왕은 단어를 만들 때 중요할수록 짧게 만들었다. 중요한 메시지들을 짧게 전할 수 있으면 독자에게 쉽게 잘 먹힌다. 또 한 명은 변용식 발행인이다. 경제부장 출신인데, 편집국장 시절에 종합 3면을 맡고 있던 나를 부르더니 “경제 기사는 숫자로 말하는 게 아니야”라고 했다. 보통 경제기사는 숫자만 좌악 나열해 쓴다. 하지만 잘 쓰는 기자들은 숫자를 리드로 안 쓴다. 숫자가 가진 의미를 앞세운다. 변 국장은 “제목은 가급적 숫자를 나열하지 말고 숫자가 갖고 있는 의미를 던져라”라고 얘기했다. 그 메시지가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 있다. 또 한 명은 양상훈 주필이다. 양 주필은 국장 시절, 처음 편집부장을 맡은 내게 “종합면 해설 기사의 제목을 해설성으로 달지 말라”고 주문했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됐다. 종합면은 대부분 해설성 제목을 단다. 그때 양 국장에게 해설 기사도 스트레이트 뉴스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해설 기사도 맥락을 잘 들여다보면 유의미한 포인트가 있다. 그것을 제목으로 뽑아내면 스트레이트 뉴스가 된다.”


    -조선일보가 도입한 아크(콘텐츠 관리 시스템)에 대해 궁금해하는 편집기자가 많다. 조선일보 디지털 전략에 대해 말해 줄 수 있나.
    “디지털 전략은 여전히 찾아가는 과정이다. 뭐라고 말하기 어렵다. 작년 11월에 아크 TF 팀장을 맡았다. 팀장인 내가 팀원들을 모아 놓고 “디지털이 비전 있겠느냐”라고 부정적으로 얘기했다. 그러다가 12월에 워싱턴포스트에 가보곤 ‘내가 굉장히 잘못 알고 있었구나’라는 것을 깨우쳤다. 내가 생각하는 아크는 국내 처음으로 네이버보다 뛰어난 시스템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편집부장 중간 공백기에 디지털 담당을 잠깐 했었는데, 지면과 디지털은 너무 달랐다. 지면은 편집자가 판단하고 그리기만 하면 됐는데 디지털은 안 되더라. 뭐 하나 하려면 개발자들한테 보름 전에, 최소 일주일 전에 부탁해야 했다. 그때 절망감을 느꼈다. 콘텐츠가 7이라면 디지털 디바이스가 3은 뒷받침돼야 한다. 예전에는 디지털 디바이스의 뒷받침이 1도 안 됐다. 이제는 최소 3은 되는 것 같다. 아크는 시스템적으로 뛰어나다. 기사를 쓰고 사진이나 영상 처리 등 기능적으로 뛰어난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그 정도만으론 훌륭한 디지털 시스템이라 할 수 없다. 구글에 가면 이미 기사 작성하는 좋은 툴이 얼마든지 있다. 아크는 그 정도 차원이 아니고 디지털 뉴스 서비스에서 레이아웃이 가능하다. 거기에 아크의 방점이 찍혀 있다. 편집자가 레이아웃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지금 그런 방식으로 콘텐츠를 다루고 있다.”


    -편집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못다 한 얘기는 없나. 덧붙여 필독서를 추천해 준다면.
    “삼성경제연구소나 LG경제연구소가 발간하는 잡지를 보라고 얘기해 주고 싶다. 경제 전문지이지만 경제만 분석하는 게 아니라 군사, 외교, 국제관계 등 다양한 측면을 분석한다. 연구소에는 경제 경영 석·박사만 있는 게 아니라 중국, 국제관계 등 여러 분야 전문가들이 있다. 남북관계 또한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북한 전문가도 반드시 있다. 편집기자 초년병 시절에 LG에서 나온 잡지를 7년 정도 봤다.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히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신문은 안목이 좁다. 매일매일 사건을 좇다 보니까 큰 흐름이 어떤지 맥을 잘 모른다. 당시에 10년 넘게 TV 없이 살았다. 원래는 TV를 무지 좋아했는데 와이프가 “너무 빠져서 산다”해서 없앴다. TV 없이 살아보니까 나한테 주어지는 시간이 많다. 그 시절에 책을 가장 많이 본 것 같다. 후배들이 그런 시간을 많이 가지면 좋겠다. 세상을 넓게 보는 안목을 키울 수 있으면 좋겠다.”

    첨부파일 안덕기 국장 메인.jpg , 안덕기+에디터-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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